본문 바로가기

체질적 불온함

안녕하지 못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비상구가 두번째 대자보를 부착했습니다. 어제 대자보 장인들을 모처에 가둬두고 한땀한땀 대량생산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부착조가 추운 겨울에 학교를 돌며 여러 공간에 부착했습니다. 

2. 어제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지에 올라운 성노동자의 대자보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저는 불법적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하여 그녀의 시민적 권리가 박탈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거대한 불법을 일상적으로 범하는 재벌과 권력자들에겐 분노하지 못하고, 소수자이며 약자인 그녀의 시민적 권리를 박탈하려 할까요? 한국 사회의 진보가 약자, 소수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우리의 운동은 무얼 위한 운동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일베와 같은 극우 커뮤니티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신다는 분들께선 이 대자보 운동의 함의가 무어라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대자보가 과연 단순한 민영화 저지를 위한 도구인가요? 신자유주의가 한국에서 전면화된 이후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이 사라지고, 외면과 소외가 일상화되는 현실에서 이 대자보의 본질은 우리의 아픔이 단지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는것을 외치는것 아닌가요?



<이하 전문>

안녕하지 못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영남대에도 안녕하지 못하다는 분들과 안녕하다는 분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여쭙습니다. ‘여러분, 안녕들 하신가요?’

‘안녕’이라는 물음은 지난한 일상에 찌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고액 등록금은 물론이고 토익성적, 스펙 경쟁에 우린 언제나 순응했습니다. 추운 겨울 자취방에 보일러 하나 마음대로 틀지 못하면서, 삼각 김밥과 컵라면에 의지하면서도 언젠가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텨왔습니다. 그러나 친구, 동료들과의 간단한 맥주 한잔의 여유조차 포기하며, 그 경쟁을 넘어 힘겹게 사회로 나아갔을 때 우리의 아픔은 과연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일까요? 내가 한 걸음 나아갔을 때 사회는 열 걸음, 백 걸음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우리의 등을 떠밉니다. 얼마나 더 이런 경쟁에 순응해야 우린 행복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연봉, 수입, 차 값, 집 평수가 얼마나 되어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우리 세대는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결혼과 출산은 물론 연애마저 유보한지 오래지 않습니까?

현실은 우리에게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살 것을 강요합니다. 그야말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지금 우리 삶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앞세운 철도 및 의료 관련 정책의 추진은 공공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고, 불확실한 삶을 더욱 암울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와 나, 우리들이 감당해야하는 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전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대자보를 통해 자신들의 아픔을 외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우리의 아픔은 과연 당연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과연 무엇 때문에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였는가?” 

저희는 이 순응과 경쟁, 외면과 소외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너 우리의 고통은 이제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당연한 아픔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뒤틀린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결과입니다. 전국에서 여러 대자보를 훼손하는 몇몇 사람들도 역시 그들의 삶의 아픔과 좌절 앞에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나요? 저희는 그들의 행동 역시 우리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저희는 묻고 싶습니다. 이 고통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몸부림으로 이 고통의 고리를 끊고 참된 삶을 살 수 있을지 절실하게 학우 여러분과 고민하고 싶습니다. 이 대자보는 선동이 아닙니다. 감성팔이도 아닙니다. 저항하라고 강요하지도,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 대자보는 아픈 우리의 현실과 그것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 체제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공적 담론의 장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린 성별도, 가정의 환경도, 생각도 모두 다르지만 서로 다르지 않은 고통에 직면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관용과 차이에 대해 인정하며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학우 여러분의 응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우린 이 아픔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를 찾고 싶습니다.

아픔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묻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제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참 된 ‘너‧나‧우리’를 꿈꾸는 대구경북 지식-만남 공동체 비상구

'체질적 불온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령 혹은 표지판  (0) 2014.07.07
우리의 첫 번째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0) 2013.12.24
안녕하십니까 두번째 대자보 원고 초안  (0) 2013.12.18
삶과 죽음의 경계  (0) 2013.11.01
기억투쟁  (0) 2013.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