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권은 정말 우리가 처한 청년 문제에 유의미한 해법일까? 분권이 이것을 해결 할 수 있을까?

 

 

 

0. 어제 지방분권추진운동 대구경북본부 주관 세미나에 다녀온 이후 분권이란 화두에 포획되어 그에 관한 사고의 연쇄에 갇혀 버렸다. 이는 오늘 오전까지 이어진 이 보잘 것 없는 사고의 연쇄애 대한 메모이다.(http://seehun.tistory.com/439 에서 이어진다)

 

어제 난 청년 문제나 내부식민지화 된 지방의 문제가 단순 분권이라는 정치, 행정적 혁신만으로는 해소가 불가능 함을 지적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제조업 대공장과 같이 노동공급을 흡수 할 수 있는 산업의 문제, 대학이 한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와 위상의 문제이며 그 근대국가가 자본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지적했다.

결국 내부식민지로 지방의 문제나 청년 문제 역시 일정한 한국 자본주의의 경로 속에 놓여 있으며 여전히 난 이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 분권의 유효함에 대해 불신과 회의를 갖고 있다.물론 그렇다고 지방분권이란 당위의 유의미함과 그들의 활동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문제라고 제시한 현상과 그에 대한 해법 사이의 타당함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지배 계서의 최상단(이자 동시에 이것은 평면에선 센터이다)에 독점된 권력을 그 하위 단위로 하향 이양 하는 분권이 과연 이 권력 독점과 집적, 집중이 만든 문제들을 유의미하게 해소 할 수 있을까? 물론 분권은 지역의 왜소화와 같은 문제들에 있어서는 분명히 시사점을 지닌다. 하지만 분권이 이뤄진다 하여 이 내부 식민지 구조와 서울 제국으로 표상되는 수도권 집적 체제가 종결을 맞을 수 있을까?

과거 브래튼우즈-GATT 체제 시기 한국의 군부 반공권위주의-발전국가라면 인위적으로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자본과 생산 체인을 정치적으로 배치 하고 배분 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의 달러월스트리트-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가 과연 자본에 대해 그런 정치적 압력을 얼마나 행사 할 수 있는지는 무척 회의적이다. 그런데 하물며 일개 국가 보다 작은 하위 단위가 권력을 이양 받아 이를 수행한다? 무척 의문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재정을 좀 더 자율적으로 편성하고 행사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수도권 집적 체제의 완화나 해체로 이어진다는 논변은 너무나도 많은 중간 과정을 필요로 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경제적 문제, 특히 내부식민지로 지역의 문제를 분권으로 돌파하는 시도는 사실상 유효성이 떨어진다. 물론 요컨대 스페인의 몬드라곤과 같이 바스크 지역의 고유한 에스닉 아이덴티티와 지역성에 기댄 국민경제 아래의 좀 자율적인 지역 경제를 도모 할 순 있을 테고, 자율성이 배가 된 재정에 따라 공공부문의 확대나 복지 공급의 효과는 증대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타파되기 힘들어보인다. 물론 지역 단위로 법인세나 최저임금 등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유치하는 시도는 충분히 가능해 보이지만 이미 집적과 집중의 보너스를 누리는 수도권으로부터 혹은 저임금, 저지대를 향유하는 동남아시아로부터 자본과 설비가 이전하는 유인이 된다기에 그것은 좀 무리한 지점이 분명히 있어 보인다.

오히려 지역화폐(LETS)와 같은 지역 내부 경제를 만드는 시도나 지역에 강한 뿌리를 둔 새로운 생산양식의 이행을 도모하는 것 역시 가능하겠지만 이는 분명히 너무 많은 부분을 상상력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 역시 존재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권, 아니 권력의 하향 이양이 이 내부 식민지로 지방(특히 지방 청년) 문제에 있어 가지는 유의미함은 상대적으로 비물질적이고 의식적인 부분, 심성적 부분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권력은 종종 행위를 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무언가에 대해 정상과 비정상/옳음과 나쁨/훌륭함 내지 잘남과 후짐 등을 규정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런 속성이 만들어내는 삶과 자존의 표준적인 형태는 늘 우리를 압박한다.그런데 이를 해체하고 가장 하위 단위인 개인들에게로 나눠버린다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물론 그 이양 받은 이들이 자신들에게 그 권력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행사 할 마음가짐을 가져아 의미있는 권력이겠지만 적어도 권력의 중심이 만들어내는 보통, 표준, 일반의 잘남, 훌륭함, 멋진 삶은 좀 기각되고 다양하고 비경합적인 삶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이런 기제가 만들어내는 정상이나 보통의 그것 이외의 것들을 쉽게 환대하지 못하지 않나. 표준어라는 보통의 존재는 그들이 사투리라고 하는 우리의 언어들을 희화화 하지 않던가? 서울의 그것은 늘 지역을 후지고 낙후되고 구린 것으로 만들지 않던가? 우리가 서울이 될 수 없다면, 서울이 만드는 그 잣대와 기준을 파괴하는 것은 방법이 아닐까? 이는 우리가 의식 속에서, 마음과 심성 속에서 서울을 지양 극복하는 방법으로 권력의 하향 이양아닐까? 저 제국과 권력의 물질적 토대의 파괴가 쉽지 않더라도 그것을 지탱하는 그런 비물질적 토대들과 싸우고 그것이 이단시하던 것들을 환대하고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긍정 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구리고 후지고 못난 것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자존이 되고 환대하여 연대를 만들고 그 잘난 서울 제국을 포위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건 아주 추상적인 망상이다. 그 구체와 실천은 사실 불분명하지만 이왕 정치적 상상이라면 단순히 지방정부에 더 많은 권한과 권력, 자원을 주는 의미로 분권 보다는 우리 삶을 규율하고 제한하고 쪼그라들게 하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으로 권력의 해체와 이양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물질적 조건에 대해 타협하고 수긍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심성과 의식 속에서 우리 자존을 조금이라도 긍정 하고 저들을 지양하고 싸울 힘이 있다면 지금과는 좀 다른 이야기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수도권의 힙함과 싸우는 지방의 촌스러움을 자존으로 삼아 긍정해본다면 지금과는 좀 다른 세계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언어-비민족 세계주의는 이론 태도에서 시작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밥 먹고 이런 망상을 해본다. 그놈의 분권 때문에 다언어-비민족 세계주의까지 와버렸다. 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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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의 이전'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가?

0. 이건 오늘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와 대구광역시 청년위원회가 주관한 세미나를 다녀오며 든 몇 가지 소회와 의구심에 대한 정리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식 글을 좀 내볼까 하는 고민 역시 존재한다.

0-1. 오늘의 핵심 주제는 지방 청년 문제이다. 주변의 분들은 주지하다시피 이 문제는 내가 한국 자본주의나 한국 사회운동사와 더불어 가장 뿌리내리고 사는 주제란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세미나에서는 유감스럽게'지방-청년'이라는 한국 사회에서의 고유한 층위를 가진 집단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것이 '지방' 따로 '청년' 따로 논다는 느낌을 너무나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일부 발표는 너무나도 개별 사례 중심으로 진행하며 자신이 제시한 물음에 대해 정교하게 풀어나가는 과정이 거의 결여되어 있어 큰 아쉬움이 있었다.

'아래로의 이양'의 당위와 그 실천으로의 결함.

내 의문을 한 문장으로 풀어내면 결국 이 문제이다. 한국에서 지방분권이란 담론은 크게 지방정부와 그 아래 단위로 중앙의 권력과 자원, 결정 능력을 이양 시키는 것에서 부터 단순히 지방정부의 역량과 자율성 강화(연방제를 포괄하는)으로 그 수준과 상이 나뉜다. 문제는 이것이 청년 문제와 같이 거대한 ‘축적 체제’ 수준의 문제에 얼마나 유효한지에 대한 물음이다. 오늘의 주제가 ‘지방 청년 문제’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부 식민지로 지방의 문제와 청년의 문제는 결국 한국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이다. 선택과 집중, 집적이라는 핵심적인 공업화 전략은 지역 간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 되었다. 이는 마치 지난 오마이뉴스 기고에서 언술한 바와 같이 맏아들이 대학가서 잘되면 그의 대학진학을 위해 희생한 모두에게 좋은 기회와 영향을 미치고 결국 이 대학 간 아들이 가정을 일으켜 세워 모두 행복할 것이라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의 확장판이었다. 한편 지방은 끊임없이 서울의 사례를 가져와 그것을 모델로 삼아 쫓아가고, 서울은 더 나아가 글로벌한 사례들을 가져와 외국을 모델로 그것을 쫓아가는 2중의 따라잡기(Catch up)이 작동했었다.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 된 지방과 서울 간의 의료 격차 10년설은 이 2중의 따라잡기 구조의 본질을 유효하게 잘 보여준다.
문제는 과거 국내의 이 이중구조가 하나의 리그에서 이뤄졌다면 지금의 지방과 서울은 전혀 다른 두 개의 리그로 나뉘어버렸다. 수리와 같이 특정한 지경학적 이점을 요구로 하지 않는 사업들은 나날이 수도권으로 이전하여 집적과 집중이 주는 이윤의 수혜를 향유하였고, 어느새 지방에는 수도권으로 옮겨간 핵심 산업의 수직계열화된 생산 네트워크의 하부 요소들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윤율과 노동의 질은 철저히 최상단의 서울 소재 대 자본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지방이 산업과 경제 그리고 인식과 에토스로부터 소외되고 멸시 되는 것은 이런 거대한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와 경로 속에 있는 것이다.
청년은 어떤가? 청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초기 공업화 단계를 지나 기술과 시설 투자가 고도화 되고 ICT 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생산공정에서의 노동 탈각, 고성장 시기의 종식과 축적의 금융화 속에서 전통적으로 대규모 노동 공급을 흡수하던 대공장의 쇠락, 그나마 있는 대공장들이 수도권과 남동권 일부 해안지대로의 이전과 같은 맥락 속에 놓여 있지 않은가?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 더 많은 급여와 사회적 평판을 향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특정한 지리적 요건을 필요로 하지 않은 핵심 산업과 그것에서 나는 일자리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이는 당연히 좋은 양질의 일자리의 규모의 위촉으로 이어졌고, 이를 둘러싼 경쟁이 만들어진다. 이 속에서 지방 청년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나?

문제는 오늘의 토론이 지방 청년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지구화와 금융화라는 한 축과 국내적인 서울제국의 약탈성을 전혀 다루지 못한채 무척 표면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지방 정부에서의 청년 조례를 이야기 하지만 여기서 청년이 하나의 ‘세대(Generation)'으로 청년인지, 특정한 ’연령집단(Cohort)'로 청년인지는 세밀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편 이 지방 정부들의 청년 조례까 청년들이 처한 의식/감정/물질적 위기들에 얼마나 유의미하게 대응하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진 못했다. 물론 주요 지방정부들의 청년 정책과 그 근간에 대한 좋은 정리와 묘사였지만 이런 것이 실제로 어떤 유의성을 지니는데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실업 문제는 분명 전지구적인 축적 양식과 생산과정의 변화로부터 연원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방 혹은 국민국가 내의 하위 단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용에서 탈락한 자들에 대한 구제와 원호, 탈상품화된 재화의 공급과 재교육의 제공 정도일까? 좀 더 하면 해당 지역의 공공부문에서의 고용을 증대하는 정도는 가능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론 이 거대한 청년 실업과 유출 문제에 분권이 유의미한 해법이라 할 수 있을까? 실천적 문제에 있어 너무나도 형편없을 정도로 텅 빈 공백지가 우리 앞에 내던져저 있는데 답은 다소 공허하고 원론적이다.

지구화에 내포된 다양한 정책적, 정치적 변화에 지방과 하위단위로의 권력 이양이 대응책이 된다면 그것은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와 이 축적 양식 외부를 만드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내향적 발전이란 개념만으로는 이를 대체하지 못한다. 한때 기대 받던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섹터가 사실상 기각 되는 상황에서 단순히 권력을 아래로 이양하는 분권의 정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오히려 더 현실적인 대응은 초국가적인 유동하는 자본에 대항하는 초국가적인 연대와 연합은 아닐까?

분권은 정말 우리가 처한 청년 문제에 유의미한 해법일까? 분권이 이것을 해결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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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사는 2등 인간? '지잡'으로 불리는 청년들

[대선기획-100인의 편지 32] '지방 청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2017428일 오마이뉴스 기고



이시훈(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변두리는 빛이 들지 않는 곳이다. 그곳은 권력을 잃고 언어를 잃고 타자화 당하고 멸시받는 이들의 공간이다. 우리 시대의 변두리는 어디인가? 그리고 우리는 변두리에 어떻게 다시 '권력''활기''목소리'를 부여할 것인가? 이는 유사 이래 정치에 부과되는 숙명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 어디에게 권력을 주고 공간과 세계, 권력과 자원을 어떻게 분할하고 분배할 것인가? 이 정치의 결정에 따라 누군가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커진다. 그렇기에 변두리와 중앙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관계이다.

  이는 다른 의미로 처음부터 주어진 중앙과 변두리 관계는 없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 변두리와 중앙의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구축되었는지를 추적하여 재구축할 수 있음을 동시에 뜻한다. 우리가 적어도 최소한 지난 촛불에서 그토록 갈구했던 최소한의 참된 민주-공화국에 살고자 한다면 내부 식민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만들어진 변두리'들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법적 평등과 동등, 부당한 차별과 착취에 대한 정치적 정의의 관점에도 부합하는 길이다.


만들어진 제국, 만들어진 식민지

 

  벌써 10년이 되어 가는 헌법재판소의 어느 결정을 생각해본다. 참여정부가 수행한 가장 큰 혁신적 시도였던 행정수도 이전을 좌초시킨 그것은 이 거대한 중심이 얼마나 작위적이고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보여준다. 그 결정은 서울이라는 우리 시대의 중심은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편 우리의 관습과 의식, 규범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와 구조 속에서 변하고 운동한다. 결국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제국의 중심은 정치적 선택과 권력과 권력 간의 협력과 합의, 투쟁의 결과이다.

  보수적 법관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관습헌법이라는 초헌법적 표현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좌초시켰다. 그들은 그저 서울 사람들이 서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과 그들이 향유하는 재화와 자원들을 지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들의 시선은 서울을 위해 세운 송전탑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과 그들의 전기를 위해 일상적으로 원전의 불온한 회색 방호벽을 보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다. 사실 그들의 정의는 이 나라 전체 대중과 공공의 정의라기보단 지극히 서울이라는 이 중심부 기득권을 위한 정의였다.

  하지만 그들은 관습헌법에 따라 수도가 서울이라는 논리를 내놓으며, 서울이 사실 어떤 경제적 효용이나 필연성과 같은 내적인 이유로 중심의 위치를 획득한 곳이 아님을 스스로 폭로했다. 이렇듯 서울은 오로지 그곳이 이 나라의 수도이자 중심이라는 일련의 관습적 사고를 통해 지지되고 정당화 되고 있었다.

  이는 다른 의미로 이 나라의 수도가, 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울이 아닐 수 있음을 증명한다. 단지 그 어떤 의식과 편견만이 서울을 정당화하고 있다. 결국 변두리만 아니라 중심도 구성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한편 중심의 존재 양식 역시 새롭게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중심과 변두리의 관계의 내용과 양식 역시 의식과 실제의 변화를 위한 투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충남 일대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내는 화력발전소 전기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일까? 노량진과 신림의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청년 다수는 어디서 온 이들일까?

 

일자리는 없고, '지방거점 국립대학'의 위상은 떨어지고...

 

  서울은 우리 시대의 원더랜드다. 그곳은 또 우리 시대의 블랙홀이다. 동시에 서울은 메트로폴리탄이며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지상천국이며 이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은 그 변두리들의 사람과 자원, 땅과 에너지, 노동을 수탈하여 유지되는 곳이다. 서울은 이처럼 변두리들을 식민화하여 착취하지 않고는 지탱되지 않지만 정작 서울은 변두리들을 멸시하고 타자화 시킨다.

  ''이라는 지칭은 어느새 더욱 분명하게 후진적이고 낡고 오래되고 구린 '서울 바깥'에 대한 멸시의 언어가 되었고, 사투리는 어느새 가난하고 천박하고 교양없고 동시에 웃긴 말이 되어 희극과 오락 프로그램에서 조롱거리로 쓰이고 있다. 심지어 많은 이들에게 대구나 광주는 도쿄나 베이징보다 심리적 거리가 먼 곳이 되었다. 그나마 부산은 해운대와 광안리 때문이라도 촌 취급은 면하는 듯 보인다.

  이 지역 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수도권이나 동남아시아로 옮겨가는 만큼 이 변두리에서 수도권 중심부로의 엑소더스(Exodus)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기존의 일자리를 따라 서울과 그 인접 지역으로 옮겨 가야 했고, 청년층은 그나마 있었던 양질의 일자리들이 사라짐에 따라 그래도 좀 더 기회가 있어 보이는 서울로 옮겨 갔다. 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건 공무원이 되거나 아니면 저임금 하청기업 노동자나 서비스직 노동자가 되는 것 뿐이다. 개중에 일부는 울산의 조선이나 자동차, 부산의 선박 부품과 해운 등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최근 조선과 해운의 급격한 쇠락은 이제 이 탈출의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서울로 향하게 했다.

  한편 다수의 서비스업과 소매업 역시 중앙의 지배하에 잠식되어 갔다. 백화점-대형마트-SSM-편의점으로 이어지는 소매시장 지배 체계는 지역의 구매력들을 빠르게 중앙으로 가져갔다. 이런 중앙 중심의 소매시장은 지역에 유의미한 경제적 기여를 전혀 만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 내부에서의 자본 증식은 이뤄지지 못했고, 지방에 남은 다소간의 하청 기업이나 서비스업을 통해 얻어진 구매력은 도소매 지배 체제를 통해 다수가 중앙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지역에 만들어진 부가가치라고는 고작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상징하는 마트 캐셔와 판촉사원, 편의점 알바와 같은 직업들 뿐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변두리 지역들은 아주 상징적이고 급격한 유출에 노출된 곳부터 느리게 죽어가고 있다. 전지구적인 생산네트워크의 유연화와 재배치, 자본 축적 형태의 금융화와 전산화, 대기업의 소매업 지배는 이제 더욱 분명하게 지역의 위상과 가치를 해체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은 이런 급격한 쇠락과 이탈을 설명하는 데 있어 아주 좋은 사례다.

  대구지역의 유력 국립대를 다녔던 00학번과 12학번의 사촌 형제들은 그 대학에 간다는 것에 대해 전혀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이 상이한 반응은 이 12년 사이의 중앙과 변두리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쉽게 읽어 내도록 해준다. 이른바 지방거점 국립대학은 과거 수도권의 주요 대학들과 대학 서열을 다투었지만 서울-지방 관계와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대학 서열 구조가 이중적 구조(1부 리그인 서울권과 2부 리그인 지방)로 재편되면서 결국 제아무리 지방의 거점 국립대학을 간다고 해도 그래봐야 '촌 지방에서 잘난' 대학이 될 뿐인 것이었다.

  '지잡대'라는 멸칭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변두리가 한층 더 식민화되고 동시에 타자화 됨을 보여준다. 결국 과거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의 식민지 내부 엘리트들이 국내 제대와 민립대학에서 제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아도 근본적으로 그들이 식민지 2등 신민들의 엘리트이듯이 더 이상 경북대나 부산대와 같이 과거 한국의 학벌 계서(階序)에서 높은 위치에 있던 대학을 간다 한들 결국은 '지잡' 내부의 엘리트일 뿐이다.

  결국 같은 '대학'이라는 학력을 가진다 해도 그들만의 대학 리그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며 내부 식민지는 격리된 공간 내에서 위치하여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별과 구분, 배제의 기제들은 지방을 타자화된 변두리와 사회경제적 탈취를 넘어 명실상부하게 스스로를 무능하고 실패한 2등 인간으로 사고하게끔 만들었다.

 

재경유능 재향무능(在京有能 在鄕無能)의 고정관념

 

  이 식민지 같은 2등 동네에도 삶이 이어지고 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전통적인 사고 속에서도 지역에 남은 혹은 떠나지 못한 이들이 있다. 그들 다수는 학업이나 직업을 위해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잡'이라는 멸칭 아래 묶여 있는 이들이며 단지 자신의 고향 내지 인근의 지역에 남아있거나 떠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원과 정보, (문화, 경제, 사회, 인적)자본의 네트워크에 배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에 남은 청년들은 우리 사회와 권력에 기입되지 못한 이들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점증되어 가는 세대 간 투쟁의 한 축이지만 동시에는 수도권-비수도권 구도가 만들어내는 학벌과 직업, 삶의 경제적 문화적 자산의 균열의 한 축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노년층 다음으로 불안정하고 동시에 사회 최말단에 놓여 있는 이들이다. 실제 SNS와 서울 지역 고학력 청년 또래 집단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반 가부장, 페미니즘, 젠더 담론들이 실제 저학력, 지방 청년 또래에 얼마나 유의미하게 확산되고 있는지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서울 중심주의적 의식/무의식은 의외로 많은 곳들에 존재하며 의도적/비의도적으로 지방과 지방의 청년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지방에 있음'의 문제를 구성되고 배치된 권력의 결과라기 보단 능력의 문제로 환원하여 이해하고 있다. '지잡'의 삶을 사는 것이 결국 그들의 무능의 탓이라는 것이다. 결국 수능을 못쳐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부모를, 지방에 사는 부모를 만났다는 이유로, 스펙을 많이 또 높게 쌓지 못했기에 그들은 이 서울 바깥의 변두리에 있다고, 중앙에 있는 이들은 그렇게 정당화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권력 있고 언어 가진 이들의 논리는 어느새 변두리의 주체들의 의식/무의식 속에 내면화 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의 존재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선택되고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서울과 지방의 문제를 단순히 왜곡되고 천박한 능력주의만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은 논리와 현상의 실제 사이에서 설득력과 정합성을 가지지도 못한다. 게다가 이미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못한 이 구조를 은폐하고 왜곡하며 동시에 이 구조의 기득권에 편승하는 논리일 뿐이다.

  이 천박하고 왜곡된 실력주의가 만들어낸 질서 속에 지방의 청년들은 한편으론 박탈되고 배제되고 소외되면서도 이 실력주의 내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나마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게,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다 믿는 공무원이 되기 위해 그들은 노량진으로 그리고 지역의 공시촌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들이 처한 이 정치적이고 동시에 역사적인 상황과 맥락에 대해 사고할 물리적 발판이 없다. 그들에겐 오로지 지금 이대로 떨어지느냐 아니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고 버티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갈 뿐이다. 한국의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 정작 학벌주의의 상단에 있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는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많은 숙고의 거리들을 던져준다.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정치

'학습과 모방을 통한 따라잡기에서 구별짓기와 이중구조로의 분리'

 

  더 이상 지방과 서울의 문제는 동등한 하나의 리그 내에서 벌어지는 모방과 학습을 통한 따라잡기 게임이 아니다.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앨리스 암스덴이 한국 경제의 압축적 공업화를 설명한 이 경구는 사실 일정 부분 서울과 지방의 관계에서도 오랜 시간 적용돼 왔다. 가부장적이고 병영주의적인 국가의 풍토 속에서 지방은 마치 똑똑한 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희생한 큰 누나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대학에 보내 동생이 성공하면 어느정도 큰 누나가 그 사회경제적 성공에 편승하고 일정한 적하효과가 있으리라 믿었던 그 시절의 논리가 지방과 서울 사이에도 통용됐다.

  학부와 대학원의 존경하는 은사이신 김태일 교수님이 1990년대 영남대에 처음 오셨을 때 학생운동을 하던 내 선배들의 표정을 보며, 나름 악전고투 하던 서울과 다르다 느끼셔서 그 차이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저희가 2년 늦심더"였다.

  이 말은 우리의 서울-지방 관계의 과거 모습을 많이도 설명한다. 서울과 지방은 서로 물자와 인력을 교류하며 서로가 서로를 끌고 견인해갔다. 하지만 이제 지방과 서울은 동등한 리그 속에 있지 않다. 이 나라 내부를 둘러산 권력과 축적 양식의 변화는 지방을 자신들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한 큰 누나 보다는 무능하고 가난한 내부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 서울에 있다는 그 자체로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서울과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의 잘남의 결과가 아님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무수한 지역의 희생과 강요된 양보의 결과이며 지역이 마땅히 향유했어야 했던 것에 대한 유보의 결과이다. 모든 것이 집중되고 집적된 결과 수도권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과밀화된 공간이 되어 지방과는 또 다른 의미의 고통의 공간이 되었다. 우리 시대는 이제 이렇게 왜곡된 공간적 질서들을 다시 배치하고 구성해야 한다.

  분권이 중요한 정치적 기획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사실 더 필요한 것은 단순히 지방자치를 강화하는 것만 아니라 공간과 공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권력을 새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는 그런 것들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고 그 배분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우리는 이제 20세기의 '선택과 집중'이 만들어낸 왜곡된 공간 질서를 해체시켜야 한다.

  연장된 20세기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변곡점으로 최근의 정치 일정에서 다시 한번 지방의 문제가 논의되고 숙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고려의 대상은 '청년''지방'이라는 두 화두가 중첩되는 지방 사는 청년들의 '미래'에 있어야 한다. 권력도, 목소리도, 일자리도, 풍부한 삶의 환경도 없는 공간에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지방청년들에게 이런 식의 희생과 양보, 배제와 소외를 강요하고 전가하는 세계에 정의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정부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이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쌓아가야 한다. 퇴락한 서울 제국주의에서 빛 잃고 목소리 잃은 이들을 위해 의식과 규범, 관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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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당한 고통과 부정된 책임

<세월호 참사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이시훈

(본색 소사이어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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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세 계절이 흘러갔다. 세 계절이 흐르는 동안 딸 잃은 아비는 이 나라의 큰 도시,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한 여름의 땡볕 아래 앉아 50일에 이르는 목숨을 건 단식으로 딸 잃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과 설을 보냈지만 유가족은 웃을 수 없었다. 여전히 열 명의 주검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깊은 진도의 심해에 잠들어 있었다. 계절이 흐르는데도 사건의 수습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이 어처구니없고 황망한 죽음 앞에 슬퍼하면서도 진실과 책임을 묻는 고독한 싸움을 진행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집권세력과 집권여당은 이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 부정하고 있으며, 책임을 묻는 요구를 철저히 파당적, 인격적 공격으로 이해하고 있다. 참사의 수습과 후속대책에 있어 유가족들과 함께 호흡하며 때로는 조율을 때로는 대변의 역할을 해야 할 야당은 온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섣부른 타협 시도로 전도유망하던 야당의 수장은 정치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야당의 기능 상실로 집권 보수당이 논의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보수 일변도의 언론 환경에서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균열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고로 폄훼되고, 어느 종교 집단의 탐욕이 낳은 비극으로 치부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고통과 이에 대한 책임 요구는 이기심이라고 공격받았다. 근래 새롭게 대두된 한국의 넷우익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해 사회 통념과 도덕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비난과 막말을 쏟아냈으며, 자식 잃은 아비의 단식에 폭식 투쟁이라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질 정도의 모욕으로 응답했다. 결국 통과된 특별법이란 것은 사실상 탈진해버린 유가족의 의사는 충분히 토론되고 반영되지 못한 법이었다. 물론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요구에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특별법 제정의 대원칙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는 집권세력과 보수언론의 프로파간다에 묻혀버렸다. 힘겨운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와 투쟁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지 못한 특별법과 특별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조사위원회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지나며 사실상 기능 마비 상태에 놓여 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통해 그 안팎에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들이 드러나는 하나의 총체적 균열이며 성찰적 계기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바로 국가의 책임 문제다. 어떠한 경위와 배경으로 그런 문제 있는 배가 운항을 할 수 있었는지, 배가 여러 결함과 문제를 떠안고 출항하는 것을 왜 국가가 막지 못했는지부터 왜 피해자들이 구조되지 못한 채 가족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야 했는지, 사고의 구조와 수습 과정에서 보인 미심쩍은 부분들과 국가의 역할 부재 전반이 바로 국가 책임의 영역이다. 이는 지난 10년의 민주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드러난 신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무능한 정부 조직과 관료 조직의 문제이며 또한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국가의 정직성, 공적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근대 이후 국가의 역할로 자명하게 수용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국가라는 공리의 문제다. 결국 세월호 참사에는 선주와 운영사, 선원, 배의 출항과 운영 감독 책임자, 구조 책임자 등이 져야할 만큼이나 국가가 져야할 책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국가는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세월호 참사는 그 사건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현실의 단면을 통해 우리에게 강력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이어진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취약해진 국가의 역할, 공공성, 책임 전반의 문제, 타자의 고통과 호소에 대한 응답 가능성의 문제를 통해 반추할 수 있는 개인의 윤리성과 공감,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희석하고 왜곡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세월호 참사에 존재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성찰적 계기가 한국 사회에 생명력을 지니고 유의미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낙관적인 답을 하긴 힘들어 보인다. 지난 2013년 여름, 김영오씨의 긴 단식 투쟁과 이어진 원내에서의 정치적 교섭의 결과, 여러 곡절을 거쳐 통과된 세월호 특별법은 진상 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위원의 선임은 물론 정부와 여당 측 조사위원들이 보인 파행적 행동으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진상 규명에 있어 가장 핵심적 요소로 기억과 성찰, 조사 전반에 강력한 시각적, 상징적 계기가 될 수 있는 세월호 선체의 인양은 경제적 논리로 유예되고 있다.

특별법과 조사위원회의 무력화, 선체인양의 지연, 넷우익과 보수 언론의 선전으로 세월호 참사의 사회적 의미 역시 자리 잡지 못하고 퇴색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세월호 참사의 마무리는 국가의 책임 없음선언과 금전적 보상(배상이 아니다)이 될 공산이 크다. 한국 사회는 이와 같은 국가적 책임, 구조적 책임이 외면 부정되고, 개인의 소통, 공감 불가능이 드러난 가까운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 냉전의 종식 이후 열린 증언의 시대1990년대 증언의 시대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처가 바로 그것이다. 김학순 여사는 최초로 이 문제를 증언함에 있어 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 인정을 요구했고, 송신도 여사는 총리의 공식적 사죄를 요구하는 소를 제소하기도 했으나 이 증언의 시대는 일본 사회에 성찰을 기반으로 한 진보를 낳기보다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로 불리는 우익의 반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증언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 고노 담화, 호소카와 연설,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지는 발언에서 부분적 사죄와 강제성의 잠정적 인정을 했으나 이것이 국가 수준의 전면적인 책임 인정의미 하지 않았으며, 자연히 국가에 의한 배상이 아닌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통한 경제적 급부의 지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양자 사이에는 국가의 책임, 구조적 책임, 성찰의 기회의 마멸이라는 많은 유비점이 존재한다. 이에 이 글은 세월호 참사의 가장 우려되는 미래상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여성평화기금)’을 상정하고, 여성평화기금을 만든 1990년대 일본의 경과와 그 과정에 나타난 책임 희석의 논리를 살피고자 한다.

 

 

. 전후 일본의 책임과 배상 문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국가 책임 논쟁은 1991년 고 감힉순 할머님의 종군 위안부 강제동원 증언을 전후하여 표면에 떠오른 일본의 전쟁,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와 그 논의와 유사하다. 1989년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육군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침략전쟁의 역사 한 가운데 섰으며, 1945년의 무조건 항복을 외친 당사자, 일왕 히로히토(쇼와 천황)이 세상을 떠난다. 비록 동경 극동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으며 직접저인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히로히토가 침략과 식민지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를 의식한 듯, 당시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의 근화(謹話)에는 히로히토의 침략 책임을 감싸고 변명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근화에서 히로히토가 비록 선전 교서와 종전 교서의 최종 결정권자지만 그 전쟁과 침략이 히로히토의 본의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전쟁은 히로히토가 원했던 바가 아니며, 그 결정은 단지 당시의 총리대신과 각의, 정치인과 군부의 책임인 것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과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등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침략과 전쟁, 범죄의 책임소재를 당시 수상과 정치인들에게 의한 것으로 격하시키고 결과적으로 히로히토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언술일 뿐이었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 종군 위안부 문제를 위시한 과거사 책임 문제는 새 국면을 맞이한다. 시작은 앞서 이야기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다. 하지만 이 국면은 단순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증언된 이상의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우선 냉전 구도가 해체되며 냉전 구도에 억눌려 있던 일본의 침략, 식민지 책임 문제가 드러났다. 비록 일본이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이던 1972년 중일공동성명을 통해 국교 수립과 동시에 중국 측의 전쟁 배상권 포기를 이끌어 냈으며, 한국과도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청구권 문제를 매듭지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 외의 국가와도 정부 간 청구권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며, 과거사 문제가 하나의 대중적 열의가 투영되는 이슈로 자리 잡는 것을 이런 외교적 방법이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전후해 한일 간에 위안부 이슈가 대두된 시점에서 일제 종군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이며 일본에 거주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 총리의 의회를 통한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을 동경지법에 제소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도 많은 사회단체들이 송신도 할머니에 적극 연대하며 여론을 형성했다.

19937월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단독 과반수가 무너지며 1955년 체제의 균열이 나타난다. 호소카와를 중심으로 한 비 자민당, 비 공산당 연립정권이 들어섰고, 연정 수립 직전이던 19938월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장관이던 고노 요헤이가 위안소의 운영, 위안부의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과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이전의 일본 정부의 입장에 비해 분명 진전된 입장이었으며 사과와 책임 인정의 단초를 제공하는 유의미한 담화였지만 담화 자체가 침략, 전쟁범죄에 관한 책임표명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고노담화 직후 들어선 호소카와 내각 등 비() 자민당 정권에서도 책임 문제에 관한 더 이상의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호소카와 내각에 이어 사회당과 자민당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한다. 사회당 출신인 무라야마 총리는 집권 기간 동안 두 개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하나는 1995년 태평양전쟁과 이전 시기 일본이 행한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를 표한 무라야마 담화이며 다른 하나는 담화 이전 1994년 국민성금을 통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골자로 하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여성평화기금)’의 설립이다.

무라야마 내각 시기 일본의 과거사 인식은 이전보다 진전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무라야마 담화 역시 여전히 천황의 전쟁, 침략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태평양 전쟁 등 일본의 침략 자체가 불가피 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사죄에 이은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정리된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담화 이전에 설립된 여성평화기금 역시 이런 흐름과 궤를 함께 한다. 여성평화기금의 구성에서 정부의 역할은 운영재정의 부담에 그친다. 기금의 조성은 일본의 보통 국민들의 모금으로 이뤄졌으며, 무라야마 내각을 이은 하시모토 자민당 내각에서 기금의 부족분을 정부 재정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구체적인 배상에서 국가는 책임과 역할을 회피했다. 결국 기금의 조성과 운영, 기금을 통한 배상(기금의 지원을 배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과정 일체에서 책임의 주체인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과거의 잘못과 고통 받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선량한 보통 일본 국민의 마음과 역할만 드러날 뿐 이다.

배상은 어떤 잘못된 행위에 의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책임이다. 하지만 책임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배상은 그야 말로 말장난 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서독은 나치 독일을 직접적으로 계승하는 국가가 아니다. 양자 사이엔 하나의 강렬한 단절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이란 국가에서 전전(戰前)과 전후(戰後) 체제 사이에 과연 그런 단절성이 존재하는가? 일본은 패전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이 현재의 상징천황제다. 천황이 비록 과거와 같이 정치적 실권(비록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지라도)을 지닌 존재는 아니지만 여전히 일본이란 국가를 그 인신을 통해 표상하고 있다. 헌법이 비록 변경되었지만 천황제의 형태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전전과 전후 모두 동일하다. 태평양전쟁의 선전 교서와 종전 교서의 최종권자는 전쟁 후에도 상징천황제의 형태로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전쟁을 주도한 이들 상당수가 동경의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통해 처벌되었지만 적잖은 정치엘리트들은 전후의 일본을 구성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현재의 일본이란 국가는 과거 서독 보다 과거사에 대해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책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일본 국가는 단 한 번도 자국의 책임을 명백히 인정하고 사죄를 표하지 않았다. 단지 계속해서 일본과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된 침략과 범죄, 전쟁을 몇몇 문제적 개인들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있고, 천황과 일본 국가는 이에 대해 그저 도의적 책임만을 이야기한다.

이런 일본의 전후 책임 문제에서 우린 몇 가지 중요한 책임 희석의 논리를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피해자의 고통을 철저히 돈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제주의적 접근으로 여성평화기금이 그 전형이다. 일본은 인도차이나 국가들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피침략 국가들 그리고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과거의 책임을 철저히 돈으로 해결해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책임 있는 사죄의 표현은 잘 이뤄지지 않아왔다. 그런 접근은 시간이 흘러 위안부 문제가 대두된 시점에서 이어진다. 여성평화기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위로금을 중요한 보상수단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통은 앞에서 말했듯이 오로지 돈의 문제로 환원된다. 특히 여성평화기금을 통한 보상은 그 과정에서 가해자의 책임은 드러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그저 선량한 일본 국민 개인들의 선의에 따른 보상만이 드러난다.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와 사과, 고통에 대한 응답, 역사에 대한 평가와 재발방지의 노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접근은 책임 부정의 논리다. 현 아베 내각에서 총무상을 맡고 있는 다카이치 사나에는 과거 일본 국회에서 자신의 세대는 전쟁 당사자 세대가 아니기에 반성을 하려 해도 할 수 없으며 반성하지도 않겠다고 발언한다. 즉 과거의 잘못을 현재의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이다. 일견 다카이치 사나에의 이 발언은 일리 있어 보인다. 실제 일본은 195,60년대 여러 피침략 국가에 여러 명목으로 전쟁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를 통해 형식적으로는 일본이 과거의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고, 결정적으로 현재 세대는 그 침략 세대가 아니기에 자신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길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 그 논지이다. 그리고 이런 책임부정의 논리의 다른 한 축은 위안부의 동원에서 일본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 후자의 논리에서 강제동원은 그저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갔던 이들이 주장하는 거짓일 뿐이다.

세 번째 접근은 다소 유치하고 졸렬하다. 그것은 위안부의 강제 동원 문제를 희석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발적 참여, 매춘, 어느 정도 눈치 채고도 따라간 사람의 존재, 즉 자발성의 문제를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즉 위안부 전체를 강제로 동원, 수탈된 순수한 여성과 어느정도의 자발성을 지닌 불순한 여성, 혹은 순수한 처녀와 그렇지 않은 이로 분할하는 시도가 이 논리의 핵심이다. 이는 아주 악질적인 논리다. 이 논리는 피해자 집단을 온전히 하나의 총체적 폭력과 성범죄를 경험한 피해자 집단으로 사유하지 못한다. 물론 위안부의 이미지들 특히 정대협이나 소녀상이 표상하는 이미지만으로 사유하는 것은 온전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분리된 접근은 사안의 본질, 즉 구조적이고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동원과 여성 수탈, 국가에 의한 성범죄라는 본질을 은폐하고 개인이 그 사실을 인지했느냐, 어느 정도의 자발성 있었느냐와 같은 문제로 전화해버린다. 그 결과 자발성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마치 보호될 필요가 없는 이들로 전락되고, 본질은 은폐되고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가 부각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피해자들을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과 증언을 그저 부끄러운 일을 들춰내는 것으로 여기는 의식 역시 이런식의 순수성 논쟁과 맞닿아 있다.

 

 

. 위안부 책임 희석의 논리와 세월호 책임 희석의 논리 사이의 유사성

 

세월호를 둘러싼 책임 문제는 여성평화기금에 이르는 90년대 일분 정부의 책임 회피 논리와 많이 닮아 있다. 여기에서도 철저히 경제주의적 시각과 책임 회피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사실 그것의 질적인 측면에선 훨씬 저열하기 그지없다.

우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경제주의적 접근은 크게 두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유가족과 피해자에 대한 접근이며 하나는 여론 형성의 차원이다. 전자의 경우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사건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지닌다. 사건의 해법과 책임의 이행은 단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다. 언론과 일부 네티즌들이 유포하는 보험금 문제, 보상금 문제를 이런 논리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식의 인식에서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하고 있는 책임과 진실규명의 요구는 그저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이기적인 활동으로 전락한다. 이는 앞서 위안부 문제에서 여성평화기금의 보상방식, 그리고 송신도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의 사과 요구에 대한 조소에 담겨 있는 정서와 일맥상통하다. 그리고 하나 여론 형성의 차원에서 경제주의적 접근 역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 이후 5월 초순부터 보수적인 언론을 중심으로 세월호 참사의 경제적 후파, 내수시장과 소비심리의 위축 이야기에 모락모락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여론 형성 과정에서 보수 언론이 가진 강한 헤게모니는 머지않아 바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점점 세월호 참사를 유벙언과 구원파의 문제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 그리고 외부세력의 행동에 지나치다는 의견들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경제주의적 접근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활동을 철저히 공격하고 평가 절하하였고, 그들의 도덕적 기반마저 침식시켰다.

또 하나, 책임 회피의 논리 역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다. 책임 회피의 논리는 크게 국가 책임 인정 여부에 따라 나뉜다.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책임 회피의 논리는 현 정권에 대한 책임 추궁 불가를 주장한다. 즉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이명박 정권을 위시한 지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달려왔던 과거 정권에 있다는 주장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지 만 1년이 갓 지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의 구조적 책임을 현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 이 첫 번째 책임회피 논리의 요지이다. 이는 마치 위에서 언급한 현 아베 신조 내각의 총무상 다카이치 사나에의 발언과 유사하다. 즉 과거 정권(과거 세대)의 오류와 실책을 왜 현재 정권(현재 세대)에게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고는 국가를 매우 파당적이고, 인격화해서 이해하는 논리적 전제의 오류를 갖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비단 민형사적 책임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국가의 책임과 정권의 책임을 등치시키는 오류 역시 존재한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박근혜 정부에 요구하는 책임은 박근혜 개인과 김기춘 개인에 대한 책임 요구가 아니다. 그들이 국가라는 기구, 체제에서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요구를 박근혜, 김기춘 개인에 대한 책임 요구로 오독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구조적 문제가 존재하는 사건의 책임이 갓 들어선 현 정권이 아니라 이전 정권에 있다는 식의 사고가 가능한 것이다. 이미 이야기 했듯이 이 구조적 책임은 단순 한 인격이나 파당에 대한 책임과 다르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져야하는 책임은 이 구조적 책임이다. 이것은 과거 정권이 국가라는 구조 속에서 수행한 규제개혁정책 대한 책임이며, 그리고 현 정권이 바로 그 정권의 체제를 계승하는 정권이기에 더욱 분명히 져야 하는 책임이다.

과거 히틀러 나치스 정권의 홀로코스트와 폴란드 침략과 이후 서독 사민당 정부의 사과는 이런 면에서 아주 중요한 사례를 제시한다.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이후 독일은 4대 연합군에 의해 분할, 직접 통치를 겪게 된다. 그렇기에 서독은 나치당의 독일제국과 국가 체제로서 구분되는 점이 있다. 그럴히게 서독 그것도 과거 나치에 저항했던 사회민주당 내각이 사과와 책임을 표하는 과정을 우리는 구조적 책임의 실천 과정이란 맥락으로 이해하고 주목해야 한다. 빌리 브란트의 사과가 가능했던 것은 이전 시대의 국가, 구조적. 책임의 문제를 한 개인의 인격, 파당에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비록 서독이 나치독일을 명시적으로 승계하지 않더라도 서독이란 국가와 나치독일은 독일사의 흐름과 맥락,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의 경험에서 하나의 선상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이전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진 침략과 범죄에 대해서 책임과 사죄가 국가 체제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이행할 의무가 서독에 있는 것이다. 결국 빌리 브란트 정권이 폴란드에 참배하고 사과 한 것은 서독 국민들이 그리고 서독이란 국가가 발 딛고 있는 역사적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 세월호 참사에서 박근혜 정권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순수한 피해자라는 허상 역시 세월호에서 비록 크게 드러나진 않더라도 곳곳에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를 문제 있는 배를 저렴한 배삭으로 이용하려던 이들이 당한 사고로 이해는 이들이 세간에 존재한다. 이는 마치 위안부 문제를 자발성과 기만성의 잣대로 분할하려는 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사실 이는 어떤 반박을 할만 한 가치도 없는 문제제기다. 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시장에서 개인이 비슷한 효율에서 더 저렴한 가격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향유하려는 것을 하나의 선으로 취급하지 않았나? 세월호 희생자들이 배의 문제를 인지하고도 자발적으로 탔건, 모르고 속아서 탔건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애시당초 그런 배가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관리 체계와 운영의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점이다.

세월호 참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 모두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문제는 바로 자명한 책임의 문제에 대해 이를 부정하고 폄하하고 희석하려는 조직적, 지적, 정치적 시도가 이어지고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양국의 정치 구조, 권력 구조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즉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문제는 양국의 정치와 사회에 내재된 어떤 모순이 드러난 계기이며, 그것의 변화를 촉발 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의 배상 방안으로 일본 측이 추진한 여성평화기금 역시 세월호 참사의 수습 방안의 한 모델로 집권세력에 의해 제시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특별법이 통과된 상황에서 배상을 논의하는 것은 다소 시기상조로 여겨질 수 있다. 현재에 더 중요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 전반이다. 하지만 선체의 인양이 요구되고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조사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른바 완전한 진상규명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결국 국가는 스스로의 책임을 온전히 지려 하지 않을 공산이 크고, 현실적인 배상을 위해 여성평화기금과 같이 관영 기금도 민영 기금도 아닌 모호한 형태의 배상 기금을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국가가 세월호 참사에 직접적 책임이 없지만 국가가 국민이 겪은 부당한 희생과 피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질 것이며, 다수의 선량한 국민의 협력과 모금이 이런 국가의 선의와 함께하는 여성평화기금식의 배상 모델이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지점이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문제 사이의 유사성 내에 존재한다.

 

 

. 나오며

 

그동안 이 글은 위안부 책임 문제의 도래와 여성평화기금의 형성 과정을 살피며 이 과정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 문제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두 역사적 사건 모두 책임의 문제에 있어 많은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새월호 참사에는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재난과 사고가 국가 책임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존재하며, 이는 이전의 사건과 세월호가 구분되는 가장 분명한 특징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세월호 참사의 수습 과정의 종착역으로 아시아여성평화기금과 같은 형태의 무책임의 배상 체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비록 일본의 여성평화기금이 와다 하루키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과 활동가들에 의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10년 가까이 지속되며 나름 개인과 집단의 대표로 어느 정도의 책임을 다 하려 노력한 것에 비해 세월호 참사에서 나타날 것으로 우려하는 국민모금 모델은 그정도의 양심과 책임마저 부재할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의 경우 위안부 문제가 이른바 국체의 책임 문제로 이어진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수준과 맞닿아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 세월호 참사의 경우 세속화된 권력의 정당성, 안정성 문제와 맞닿아 있기에 국민모금식의 배상 체계가 들어선다면 그 과정은 여성평화기금 보다 훨씬 부도덕할 공산이 크다.

다른 한편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1990년대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열린 증언의 시대와 거기서 나온 증언들이 동아시아 전체에서 하나의 역사적, 정치적 합의와 공통의 기억, 지역적 이니셔티브로 나아가지 못한채 개별적인 증언으로 노화되고 마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 90년대 중반 전후 50주년을 전후해 이른바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일련의 보수 우익의 운동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새역모에 의해 추진된 역사 교과서 집필이었다. 이후 일본 사회에서 과거 전쟁과 침략, 가해의 기억과 책임이 착근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경제적 위상의 불안정화, 중국의 부상, 민족주의적 적대의 심화와 맞물리며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이른바 보통국가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에 의해 증언된 고통의 기억이 사회적으로 착근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을 이러한 일본의 경우와 함께 5.18과 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기억투쟁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 하나의 성찰적 계기로 남아야 할 세월호 참사가 진상 규명과 책임 규명에 실패하고 책임에 수반되는 배상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할 경우 생떼 같은 목숨들이 남긴 그 무언의 증언 역시 뿌리 내리지 못할 것이다. 국가의 무책임과 자본의 탐욕, 관료의 무능과 부도덕한 언론이 낳은 세월호 참사는 과연 어떻게 수습 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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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는 대리인이 아니다.

최근 국 선언에 관해 인제대와 울산대에서 벌어진 일들은 상당히 주목할만한 경우이다. 두 곳 모두 총하갯ㅇ회는 공통적으로 학생들의 여론 수렴의 부족을 근거로 시국선언 참여를 거부했다. 물론 시국에 대한 인식과 접근, 입장에 차이는 있지만 이 두 대학의 총학은 모두 공통적으로 학내 여론 수렴의 문제를 거부의 이유로 들었다.

문득 예전의 두 사례가 생각난다. 하나는 내가 졸업한 학과의 일이다. 내가 졸업한지 좀 되어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터졌을 당시 난 아직 학과에 남아 있는 후배들에게 왜 영남대 사학과(아 나의 사학과는 죽고 역사학과라는 남이 거기 있더라..)는 왜 이 문제에 대해 대자보나 입장이 안나오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의외였다. 일부에서 이에 대해 학과 학생회의 참여를 촉구하였지만 당시 과 회장은(사실 누군지도 모른다 ㅜ 난 화석..) 전체 학생들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당면한 역사학계에 대한 모욕과 도발을 넘겼다.
이에 되게 비교되는 사례는 바로 2007년 대선 당시 내가 있던 문과대 학생회가 2007년, 2008년 집행부의 이름으로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경우다. 우린 어떠한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린 학생회를 과연 정파적으로 전유한 것인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학생회를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유한 것이라면 난 욕을 먹어도 싸겠지만 우린 학생회가 단순한 대리인, 대행자가 아니란 판단 하에 그렇게 일을 진행했다. 과거 전대협 이래 현재 한대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통적 학생운동의 흐름 속에서 학생회는 학생들을 대표하되 모든 학생들의 의견을 대리하는 곳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입장이 존재하였고 이 입장과 의지를 바탕으로 학생들을 대표했으며 학생들도 그런 학생회 집행부를 선출했다. 이는 일종의 리더십과 팰로우쉽 관계가 구축되었고, 학생회의 고유한 입장과 판단에 대한 재량권이 부여된 것이다. 고로 우리 07년 일촌맺기 학생회 집행부나 08년 참 학생히 집행부가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였다 하여 우린 단과대 2800명의 정치적 의사를 박탈하거나 왜곡하였다고 보기 힘들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차이다. 대의 기구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이해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즉 대의 기구 자체의 주체성, 의지가 존재하는 것이고 대중은 대의기구를 이를 바탕으로 선출하고 지지한다. 대중들 속에는 이 의지, 주체성의 내용에 반대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입장과 의지의 차이가 입장이 다른 이들의 주체성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전체 학생들에 대한 여론수렴이란 논리는 왜 등장한 것일까? 이는 결국 학생회 더 나가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정당 정부 등을 대리자로 이해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즉 그 조직 자체의 의지, 주체성을 소거하고 구성원들의 개별적 의견 모두를 수용하고 따르는 역할로 학생회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학생회의 정치적 문으력, 무채깅ㅁ에 대핸 정당화 기제인 동시에 일부에 의한 전유를 근거로 공공성을 무력화 하는 시도이다. 그런데 어느새 이런식의 대리 논리가 팽배하다. 여기서 우린 민주주의가 '단지 모두의 이야길 듣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리더십을 부여받고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면 때론 대중의 의지나 요구와는 다소 시간차가 있더라도 먼저 책임지고 치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후에 평가받고 결과에 대해 책임 지면 되는 일이다. 이러한 구조 원리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고 고민하지 않기에 '여론수렴'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안그래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학생회의 타임테이블을 고려할때 여론 수렴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임기를 마무리 할 것이 자명한데도 여론 수렴을 핑계 대는 것은 그냥 하기 싫다는 것에 대한 우회적 선언이다. 그리고 이 대리 논리는 이런 정치적 무책임, 무능력, 면피를 정당화 하고 있다.


11월 1일오후 5시 30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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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생이 쓴 서울에서 집회 전략을 보고 예전에 하이네였나..여튼 비교적 직전의 촛불 정국때 비슷한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일반 시민들은 시청 광장에서 즐겁게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놀이터를 열고, 소위 말하는 선수들은 강남, 신촌, 수유, 건대 앞, 대학로, 영등포 등에서 게릴라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학생의 구상은 기본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의 선상인듯 했다.

그 내가 사랑하는 소설이자 영화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분한 그레고리우스가 찾은 아마데우 프라도의 묘비에는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다"라는 글귀가 세겨져 있었다.

국가가 일부 지배집단에 전유당하고, 공적 권력의 공공성이 침해당하며 정치가, 제도가 다시 재권위화 될때 저항은 공민의 의무다. 저들을 쓰러트리고 저들을 끌어내리는건 의무다. 하지만 건곤일척의 승부, 모든 역량을 한 곳에 모으는 일점 돌파의 승부로는 아주 작은 결과만을 얻을 뿐이다. 지속성 있고 생활공간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떠들고 노래해야 한다. 비록 세상이 개판이라도 우리가 안죽었다는 걸 외쳐야 한다. 그 길은 광화문에서 외치는 청와대로 가자..그 사이다 같은 구호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길이다.


11월 3일 오전 1시 33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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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담병(紙上談兵):제갈량 증후군

  

기원전 260, 삼진(三晋)의 분립으로 일어서서 한때 진()에 대적할 만큼의 대국으로 중국 화북에 우뚝섰던 조()의 세력이 한 판 싸움에 꺾여 버린다. 진의 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장평 전쟁은 햇수로 3년 간 진과 조의 대치 속에서 지구전으로 흘러 갔다. 진의 대장으로 가는 곳 마다 승리하여 사신의 이미지였던 백기가 이 지구전을 타파하기 위해 새롭게 대자응로 부임했지만 조의 노련한 명장 염파의 지구책 앞에선 이전 같은 시원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에 백기는 조나라에 소문을 낸다.

조나라에는 염파와 더불어 또 한명의 명장이 있었다. 조의 선왕인 조 혜문왕 당시 혜문왕의 동생인 평원군에 기용되어 진의 한 공격을 놀라운 인내와 결단력으로 물리친 마복군 조사였다. 그런 조사에겐 온갖 병서에 통달한 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들이 마복군의 뒤를 이어 조나라의 명장이 되리라 여겼지만 조사는 자신의 아들이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뽐내기 좋아하고 거만하다 하여 장군이 되지 말라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백기는 지구책으로 이 전쟁을 팽팽하게 이끄는 염파를 끌어내리기 위한 반간책으로 아직 어떤 경험도 없는 조사의 아들을 이용한다. 조나라에는 백기가 염파가 아니라 조사의 아들 조괄을 두려워 한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조 효성왕은 재상 인상여와 조괄의 모친의 간언에도 단호히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백기에 대항토록 했다.

결과는 많은 이들이 아는 조군의 궤멸이었다. 조나라의 무령왕과 혜문왕 시기의 강고한 조나라군은 지구책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공세에 나선 조괄의 선택에 모두 몰살당하고 포로가 되어 40만명이 일거에 생매장 당한다. 이 한번의 인사에 이제 조나라는 과거 전국 칠웅의 패권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로부터 종이 위에서 군을 움직인다며 조괄을 비웃는 지상담병이란 성어가 나오게 된다.

 

사실 이런식의 일은 생각보다 비일비재 하다. 요컨대 삼국지의 마속이나 하후무, 조상, 염우를 위시해 무수히 이런 경우를 본다. 모두 공통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끊임없이 과시하고,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며, 자신이 재능 있으나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 정도가 공통점일 것이다. 한신이나 이목, 육손처럼 일거에 재능을 인정 받고 중요한 위치에 기용 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그들이 재능을 인정 받는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서의 그들의 태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조괄과 같은 부류와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인터넷의 발명과 월드와이드웹의 확산은 인류 문명사에서 한번도 경험한적 없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공간에 대해 많은 이들은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확산하는 기능을 기대했다. 적어도 이 공간 내에서는 누구나 같은 말 할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 말과 목소리의 값이 같은건 아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이 소비주의와 고독의 낙원에서 정치도 논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그 속에서 나오는 제갈량병이다. 그것은 일종의 경도된 확신이며, 자기 인정의 욕망이며, 자신에 대한 도취였다. 정치를 마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이럴 줄 알고~~”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의 탁월함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인정 받는 것에 갈급해 하는 그런 이들의 모습이다.

예측과 분석은 그것을 제시하는 이 개인의 탁월함만을 위할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일이 이리 되고 저리 되리라 보는 이유에는 설사 어떤 비관적 상황이 오더라도 근본적으로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을 이뤄내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A는 망한다, B는 어디에 배치된다 등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끼치는 파급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제갈량병을 앓는 이들 상당수는 분석과 예견, 혜안의 탁월함을 위해 정작 우리가 그것을 고민하는 목적을 상실한 이들이 많다. 조괄은 병법에 밝고 통달했지만 결국 그 아비와 달리 40만이 넘는 이들 그리고 더 나가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이어지는 그 목숨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조의 40만은 땅 속에 파묻쳤으니 비록 종이 위에서 악의와 관중을 넘나든다 해도 결국 그것의 근본적인 목적 없이 그 재능만을 갈구하고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개인에게도, 그가 속한 조직에도 별로 좋은 영향은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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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의 교훈

​​1. 독점의 폐해
전체 인스턴트 메신저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카톡, 둘이서 검색, 광고 점유율 합쳐서100%에 가까운 다음과 네이버. 통신부문까지 이번 위기에서 가장 먼저 무력화 되었다. 생태계는 다양성과 혼종이 안정을 이룬다.

​​2. 우리는 시스템과 국가를 믿을수 있을 것인가?
여름 내내 소음이던 재난 메세지는 정작 최악일수 있는 재난 앞에선 요지부동이었다.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고. 핵발전소에 대한 우려와 불신은 높아졌다. 세월호-후쿠시마 시대의 국가와 국가가 제공하는 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은 의외로 뼈 속까지 학습되어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 국가론은 이미 우리의 뼈와 살 속에서 지워져가고 있다.

​​3. 신도시라는 재난
대구로 치면 상인 성서 안심 범물, 수도권으로 가면 일산 평촌 등등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도시 초기세대에 지어진 성냥갑 아파트들은 지진이 조금 강하면 훅하고 무너질꺼다. 그 아피트 중 하나에 살아서 더 무섭다. 내진은 커녕 부실시공만 아니면 좋겠다.

​​4. 탈핵!!
이런데도 원전을 해야할까. 물론 즉각적인 탈핵은 불가능하지만 단계적인 탈핵이 필요하다. 내가 기억하는 21세기 대부분의 지진은 핵발전소가 밀집한 이 지역에 밀집해 있고 노후 원전 비율도 높다. 생산성등의 이유나 즉각적인 전기료 인상은 불가능 하더라도 어쨌든 핵발전을 세워야 한다. 폐로와 탈핵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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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대전 시대의 최전선, 성주를 위하여

 

34번째 성주 촛불 Photo by 김도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의 핵심적인 장비인 고고도미사일 요격체계(THAAD. 이하 싸드’)의 한국 배치 문제가 장마처럼 슬쩍 다가와 번개처럼 결정되었다. 배치여부와 배치 장소를 두고 중, 러 등 인접국가와 국내 평화론자들과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은 기습적으로 성주군의 시가지와 인접한 과거의 방공기지에 싸드 배치를 결정했다. 싸드 미사일 포대와 광범위한 지역을 탐색할 수 있는 레이더의 배치는 북한의 탄도탄과 핵공격 방어를 명목으로 하지만 조금만 그 내막을 아는 이라면 이 미사일의 한국 배치는 철저히 중국에 대한 견제이며 미국의 전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구 근교의 조용한 성주는 단 몇 마디의 배치 발표로 인해 동아시아 대전 시대의 최전선이 되어버렸다.

  싸드의 배치 과정은 문제투성이였다. 국방부는 특정한 지역의 민간 사회에 지대한 효과를 야기하는 싸드를 배치함에 있어 최소한의 민정, 정무 감각을 결여한 채, 안보 우선주의로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마치 국가의 명운이 걸렸으니 거역해선 안 되는 절대 명령과 같은 전근대적 태도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떠한 사전 토론이나 공청회 한번 없이 싸드는 성주에 내려왔고, 이 불안하기 그지없는 기계 덩어리들의 등장에 주민들은 반발했다. 하지만 정부는 주민을 설득하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기 보단 그냥 안전하니 믿으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그들을 님비로, 지역이기주의로 몰아붙였고, 이젠 외부세력, 순수 주민 타령으로 성주 주민들을 분리, 고립시켰다. 공개된 절차와 제도, 정보의 투명성, 관료와 군사 조직 논리에 대한 민주적 통제, 수용지역에 주민에 대한 정무적 배려와 주민 참여를 통한 조정과 조율의 기회 등은 애당초 없었다. 이런 국가의 행태 즉 권위주의, 비밀주의, 관료주의, 안보제일주의, 무책임주의, 공안논리, 시민들의 연대를 막는 분리-고립 전략 등은 모두 후쿠시마 원전 참사와 세월호 참사 당시의 한일 정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여름의 성주는 어떤 면에서 후쿠시마와 세월호를 잇는 결정체였다.

  이런 무리한 과정을 밟아 성주 성산에 싸드가 배치된다면 우리는 비록 46천 성주 시민들에게 불안과 고통을 전가하고서라도 평화와 안전을 이룰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 싸드가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 줄 가능성은 무척 요원해 보인다. 싸드는 북한의 탄도탄과 핵무기의 존재를 배치 이유로 하지만 정작 싸드에 가장 민감한 입장을 가진 곳은 중국이었다. 즉 중국과 러시아를 위시해 많은 이들은 싸드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중국(더 나가 러시아까지)을 향한 미국의 전진 압박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 관계 속에는 남북 관계, -, -, -미 사이의 복잡한 관계 방정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제 1 원칙은 평화다. 이것은 좁게는 국내의 평화, 남북의 평화인 동시에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의미한다.

  이 평화에 대한 갈구는 너무나도 취약하다. 미국은 중국과 친교하면서 동시에 대 중국 압박, 봉쇄 체제를 바탕으로 한 질서 유지를 대전략으로 두고 있다. 중국은 어떠한가? 대국다운 역할과 움직임을 강조한 대국굴기와 유소작위라는 중국의 전략은 결국 미국 주도의 서태평양에서 중국에 의한 질서 변화를 이야기한다. 즉 미중 양국은 한쪽에선 친교와 협력을 강조하며 다른 한 면에선 홋카이도에서 말라카해협에 이르는 지역에서 충돌하고 있다. 이 와중에 우리의 땅에 싸드가 배치된다는 것은 우리가 더 확고한 미일한 동맹 체제에 들어섬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맹이 빌미가 되어 분쟁에 휩쓸리거나 핵심 교역국 중국과 소원해질 수 있음을 뜻한다. 또한 싸드 배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평화의 가능성을 위축시키고, 이 지역을 동맹과 군비 경쟁의 공간으로 분할할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21세기 냉전으로 동아시아 대전을 더 치열하고 뜨겁게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한 여름의 성주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아시아에서 남중국해와 더불어 동아시아 대전 시대의 새 국면을 여는 지역이 되어버렸다. 다시 반복하듯이 우리의 원칙, 우리의 이익, 우리의 희망은 평화다. 동아시아에서의 어떠한 전쟁도 우리에게 긍정적인 전쟁일 수 없다. 이 대전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우리는 싸드와 맞서야 한다. 싸드를 넘어 동아시아 대전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국제적인 연대와 동시에 일국 내의 권위주의, 안보우선주의, 관료주의, 비밀주의와 맞서야 한다. 또한 끊임없이 적을 만드는 순수, 외부세력, 종북의 논리와도 맞서야 한다. 그것만이 오키나와 후텐마와 제주도 강정에 이어 전쟁에 맞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싸우는 성주의 시민들의 싸움에 응답하고 연대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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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먹짤리아누스와 호모 있어벌리투스의 탄생



  한때 SNS에 대해서 공론의 장 내지 헤게모니 구축을 위한 문화적 진지의 가능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길 주고 받는 우리에겐 PC 통신에서 출발해 다음 까페에 이르는 사이버스페이스사(史) 초반의 중산층 인텔리 청년 집단들이 이뤄낸 어떤 성과가 주는 잔상이 있었다. 그런 기대를 구태여 풀어 써본다면 그것은 집단지성이란 말이 드러내는 대중에 대한 신뢰, ICT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이버 민주주의와 그에 따른 직접적인 참여와 공론, 정보의 공개와 유통을 통한 대의제와 관료제의 보완,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였다.
지금의 SNS는 정말 초기의 기대에 부응하는 공간일까? 단언컨대 지금의 SNS는 먹짤과 있어벌리티의 공간이고 먹짤과 있어벌리티, 소비주의의 환상에 잡혀 있는 호모 먹짤리아누스와 호모 있어벌리투스의 세계다. 나날이 대중의 지성과 숙고에 대한 기대는 폭증하는 단편적인 죽은 정보의 증거와 전체 유통량의 다수를 차지하는 먹짤과 있어벌리티, 상업광고들에 잠식되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요컨대 개인적인 사건이 있었다. 오랜만에 경북대 동문에 있는 삼겹구이 정식을 먹고 나도 대세에 따라 그 사진을 페북에 올렸다. 그런데 삽시간에 좋아요와 댓글이 폭풍처럼 달렸다. 아마 내가 쓴 어떠한 기고나 장문의 글들도 그런 관심은 못받아 본 것 같다. 난 늘 글을 올리며 사람들의 비평과 피드백, 토론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은 ‘어렵다’라는 말 조차 안할 정도로 무신경하다. 대개 보면 페북과 같은 공간에서 비교적 독해를 요구로 하는 글을 올리는 계층은 상당히 고정적이다. SNS의 대부분의 데이터는 사실상 어떤 정보 값이나 시각이 없는 먹짤과 여행사진, 소비에 대한 관심 등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모두가 맛있고 멋있고 행복해 보이고 풍요로워 보이는 이 공간이 주는 부담 때문에 이 공간을 떠나기도 한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자랑’과 ‘인정’의 욕망은 존재한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의 사이버 스페이스는 정념과 자랑의 공간이 된 것은 아닐까.

이게 일인분에 5천원이다. 이건 2인분. 내 생애 '좋아요' 기록이었다...


  내 글에 별로 관심이 없는건 내가 워낙 졸문이기도 하고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일수도 있다. 사실 그다지 인정받을 만한 문장과 시각이 아닌 것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먹짤에게 눌린 것은 뭔가 기분이 묘하다. 이것은 단순히 내 글이 관심 받고 조망 받지 못하는데 대한 분노나 좌절과는 다르다. 난 누군가의 좋아요나 하트를 기대하지만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본질은 우리가 시간과 독해력을 요구하는 장문 보단 단문화 되고 짧은 정보값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주 된 지식 획득의 경로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숙고와 독해, 논증을 요구로 하지 않고 마치 잘 정리된 학원 강의처럼 ‘팩트’만 딱딱 짧고 쉽게 정리된 단문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하나의 주체로 그 맥락과 역사, 배경을 파악하려는 노력, 이 하나의 토픽을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상상하는 사고를 제약한다. 아마 이런 단문화는 세계를 단편적인 정보와 ‘팩트’로 가득차게 만들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인간의 의미는 있어벌리티와 먹짤리티에 있다. 배고픔과 소비, 여행 등 비 지적 활동이 우리에게 의미가 된다. 세계를 파악하고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지려는 시도 보다는 당장 내가 먹으 메뉴와 내가 새로 산 옷, 내 주식의 가치 변동이 우리에게 더 본질적인 존재론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SNS는 새로운 인간, 먹는 것을 찍고 미감과 향 등 음식의 모든 맥락을 거세시킨 이미지만 소비하는 호모 먹짤리아누스와 소비주의적인 성향의 나열로 점철되는 호모 있어벌리투스를 탄생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문화적 헤게모니 진지? 숙고과 참여의 직접 민주주의? 엿이나 주라 해라. 정치는 그것의 고유성을 엿 바꿔 먹고 정파적 이해관계와 권력관계로 환원되고 현재의 All of Nothing의 구조 속에서 적대와 수사, 정념만 가득하다. 우리의 기대는 장렬히 패배한 것이다.


덧. 먹짤에 좋아요가 많이 달린게 좋아서 이런 글을 쓰는건 아니다. 어제 저녁에 느낀 묘한 위화감, 자괴감에 대한 정리에 가깝다.

덧. 모두에게 쓸 수 있는 세계를 주었지만 모두가 문학인이, 역사가가 되지 못했다. 모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세계지만 모두가 철학자가 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성경을 읽게 하였지만 모두가 사제는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린 만인과 대중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선 안된다. 그것은 단순히 ‘자극과 선동에 노출되어 샌더스나 트럼프나 지지하는’ 대중에 대한 혐오나 계몽과는 다르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는 모두가 철학자일 수 있고, 모두가 문학자일 수 있고 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는 세계다.

덧.한편 이는 경제적 불황과 노동의 유연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인간이 인간됨을 얻고 행하는 시간이 양과 깊이에서 제약 받고 철야와 특근에 몰리는데 숙고나 참여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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