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2017)

 

 

  DC 코믹스가 MCU를 따라 자사의 원작들을 실사 영화화 하기 시작한 첫 작품 <배트맨 VS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대슈>>(2016)이 대중과 평론계 모두로 부터 거의 <클레멘타인>급 혹평을 받은 이후 DC의 저스티스 리그 시리즈는 엄청난 대중적 우려를 돌파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더우먼>(2017)DC 코믹스 히어로 영화의 사실상 새로운 국면을 여는 영화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상대적으로 배트맨이나 슈퍼맨과 같이 DC르 상징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대슈>에서 무척 뜬금없이(그리고 적응 안되게) 나온 원더우먼의 영웅서사로 DC<배대슈>가 만든 거대한 인식의 장벽을 뚫고자 했다.

   직전작 <배대슈>에 비하면 비록 대단한 국내에서의 상업적 흥행은 아니지만 영화 자체의 평은 무척 괜찮은듯 하다. 영화 상영을 전후해 원톱 주연인 원더우먼 다이애나 프린세스(이하 다이애나‘) 역의 갤 가돗을 둘러싼 시오니즘 문제와 레반트-아랍 세계 정세 문제가 영화에 논쟁을 가져오긴 했으나 영화 자체는 <배대슈>에 비하면 나쁘지 않다는것이 중론인듯 하다.

  한편 더 주목 되는 부분은 이 영화가 조지 밀러의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 이은 페미니즘 영화로 그 담론의 한 축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것이 놓이는 여러 연출과 이야기 그리고 그것들이 시대나 독자와 만나는 지점에 따라 여러 논의 구조를 가지게 된다.

 

영화의 어떤 지점에서 <원더우먼>은 페미니즘 영화로 읽히는걸까?




   아마 몇 가지 상징적 요소들이 영화의 페미니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우선 영화에서 원더우먼인 다이애나가 온 곳은 여성들만으로 이뤄진 데미스키라이다. 데미스키라에 사는 이 여성 종족 아마존은 평범한 인간으로 여성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존재로 제우스에게 특수한 권능과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바로 태초의 싸움에서 인간을 혐오하고 적대하여 제우스와 싸워 패한 아레스로부터 인간 세계를 보호하는 소명을 받고 있다.

   여기서 전쟁의 신 아레스는 남성, 전쟁, 파괴, 이성, 과학, 냉정, 합리, , 불 등을 표상하는 듯 보인다. 이런 강력한 아레스에 대항하는 존재로 아마존 여성을 두는 이유는 원더우먼과 그 일족에게 이에 대항되는 어떤 속성이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데미스키라에 독일군이 상륙한 시점부터 영화가 끝날 때 까지를 돌이켜 보면 아마존의 여성들에게는 아레스에 대척 되는 어떤 속성들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인다. 평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측은지심, 신뢰, 희생 같은 이미지들 말이다. 물론 영화 속의 모든 여성이 아마존의 여성과 같진 않다. 영화 속에는 닥터 포이즌과 같이 아레스적 질서에 부합하고 충성하는 여성 역시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페미니즘 서사로 파악 한다면 아레스적 세계가 표상하는 남성적 질서에 대항하고 그것을 무너트리는 서사로 영화를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아레스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인간을 혐오하고 불신하면서도 그들의 영혼에 속삭이며 세계를 파괴하고 불길에 휩싸이게 한다면 다이애나의 모습은 그 아레스가 보여주는 음흉하고 잔인한 그것과 무척 비교되는 지점이 크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아쉬움이 크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가장 흥미롭게 본 지점은 데미스키라를 떠나 스티븐과 함께 런던에 온 다이애나가 겪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한편으론 장 르노 주연의 영화 <비지터(Les Visiteurs)>(1993)에서 현대로 시간을 건너온 중세 기사들의 모습이 연상 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비지터>에서 장 르노와 크리스티안 클라비에의 모습이 아주 웃긴 코미디라면 <원더우먼>에서 런던 시퀸스는 이 어색하고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길 통해 근대의 규범과 규율, 제도, 문화, 의식 모든걸 도리어 폭로하는데 더 가까워 보인다.

  단기 20세기 초입의 런던이라는 시공간이 무엇을 표상하는지 생각 해보면 이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마치 안드로메다에서 떨어진 인간처럼 이 시대의 질서 바깥에서 들어온 이의 눈에 보이는 온갖 이해 불가능한 런던의 모습과 그런 다이애나에 도리어 어색해 하고 어려워하고 당황하는 스티븐과 일행들의 모습이 무엇을 보여주지는 자명해 보인다. 결국 근대 바깥에서 온 이를 통해 근대 사회가 어떤 규범과 제도와 의식들로 여성의 위치 값을 정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더 나가면 다이애나가 상징하는 어떤 페민한 가치나 규범 체계, 비 근대의 의식역시 보여주는 것일테고...

 

여튼 CG는 여전히 적응이 안되고, 고속카메라를 이용한 여러 연출들도 참 마음이 안간다. 다이애나의 복색 역시 마블의 영웅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전근대적 멋과는 좀 괴리가 있어 보인다. DC가 이 다음에 만드는게 뭔지 봐야 이 시리즈의 흥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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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음악동화. 동화를 보는 내내 노래를 듣는 재미와 목소리 연기를 듣는 즐거움을 느낀다. 뻔하고 또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만화 그림과 소리들이 시간 내내 행복감을 준다.

라라랜드와 좀 다른 방식으로 꿈에 대해 풀어낸다. 영화가 끝났을때이 영화를 봤으면 하는 사람 몇의 얼굴이 눈 앞을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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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스트레인지(2016)

 

  

<닥터 스트레인지( 이하 <닥터>)는 그간 마블 스튜디오가 만들어온 작품과는 그 궤를 달리 하는 작품이다. 작중에 틸다 스윈튼의 대사로 설명되었듯 <닥터>의 세계는 어벤져스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지만 실제 그 세계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역할을 수행하는 세계는 묘하게 분리되어 있는 세계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어벤져스의 세계가 물질, 기계, 과학기술, 과학의 세계라면 <닥터>에서 마스터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정신, 영혼, 초월, 신비의 세계다.

<닥터>는 탁월한 신경외과의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가 교통사고로 인해 손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벌어지는 좌절과 손을 회복하기 위한 사투의 연장으로 수련 세계의 진입과 성장을 흐름으로 하고 있다. 즉 원래의 닥터 스트레인지의 삶이 어벤져스의 세계에서 교통사고를 계기로 마스터들의 세계로 넘어오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 세계는 마치 선불교나 무협물, 도교, 라마교, 힌두교 등이 뒤섞인 듯 한 이미지를 가진 종교적 세계.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


그리고 그 세계 내에는 이 세계를 관장하고 지배하는 자연 법칙을 둘러싼 교리의 대립이 존재한다. 이는 영원-불영속, 무한-유한, 정복-순응, 초월-운동의 대립이다. 이는 틸다 스윈튼이 분한 에이션트 원의 제자들 사이에서 에이션트 원의 정당성, 그의 전재의 정당성, 그의 가르침의 정당성에 대한 교리투쟁이기도 하다. 죽음과 그것을 예비하는 시간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 에이션트 원은 시간, 죽음, 자연의 법칙에 대해 영원과 무한의 법칙으로 그것을 전복 시키려 하며 어둠의 차원을 지배하는 도르마무를 끌어들이려 하는 케실리우스를 상대로 새로운 제자 스트레인지와 함께 맞선다.

결국 에이션트 원은 영원에 수렴하는 듯한 삶의 마지막을 맞는다. 그러며 그는 자신이 어둠의 차원의 힘을 받아들였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케실리우스처럼 영원과 무한, 정복을 갈구하는 듯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제자인 스트레인지와 모르도의 입장은 갈린다.(그리고 난 추후 이 이야기가 후속편을 이끌 것이라 본다. 케실리우스와 모르도는 둘다 본질적으로 교조이며 고정된 이상, 가치에 대한 맹신자이다. 그에 비해 에이션트 원과 스트레인지는 흔들리는 존재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둘은 우선 홍콩 생덤을 지키기 위헤 케실리우스에 맞서고, 여기서 스트레인지는 모르도가 받아들이기 힘든 법칙에 거스르는방식으로 도르마무의 강림을 저지하고 그를 저 먼 세계로 추방한다.

스트레인지는 원래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신적 위치에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오만을 가진 인간이며 물질주의자이며 합리주의자, 과학주의자, 이성주의자이다. 동시에 세계를 운동하는 실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그가 광신적으로 자신의 손을 회복하는데 집착하는 것은 이런 면을 보여주는데 충분하다 생각된다.) 하지만 스트레인지는 동시에 선하며 에이션트 원과의 만남으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며 자신을 놓음으로 자신을 정립하는 방법을 이해했다. 동시에 그는 순응과 정복이라는 양자의 교리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인지는 이 극에 나오는 에이션트 원, 케실리우스, 모르도를 통합하고 넘어서는 존재다.


어질어질


영화는 비슷한 주제, 비슷한 연출,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무수한 영화들을 모두 넘어선다. ‘신비로운 동양’, ‘신비로운 마법의 모티프를 끊임없이 가져오지만 오리엔탈리즘의 구조, 서구적 인식의 구조로 그것을 야만, 신비, 비과학 등으로 가두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세계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차원과 층위, 운동하는 형태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고 인셉션을 업그레이드한 듯한 연출로 이를 묘사한다. 한편 흔한 히어로물처럼 압도적인 존재인 적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케실리우스는 강하지만 각성한 스트레인지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 영화는 미래의 강한 적, 에이션트 원의 공백에 따라 다가올 위험으로 가득찬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으로 닥터 스트레인지가 탄생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최근 정국에서 우리 국민들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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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2016)



 과거 소설로 나와 큰 반향을 일으켰던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영화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의 손에서 탄생했다.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감정선은 제국주의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들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손예진의 연기가 무척 좋았고, 박해일도 참 좋았다. 단 분명히 많은 부분이 픽션이 존재하고, 지극히 의도적으로 덕혜옹주의 위상을 끌어올려 극의 동력을 주기 위한 각색이 존재했으며, 동시에 의도적으로 그녀를 비운의 왕녀인 동시에 식민지 민중들의 희망, 민족주의의 아이콘으로 각색하려는 시도는 무척 불편하고 캐릭터 구축에서도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것 같다. 차라리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던 한 여인의 삶에 더 많은 방점을 두었으면 어땠을까? 물론 이 영화를 <인천상륙작전>류의 극우 파시스트 영화로 치부하기엔 그 짜임새가 좋지만 여전히 우린 식민지 경험을 스스로 객관화하지 못하고 탈식민의 위치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결국 영화는 덕혜옹주의 삶을 설득력 있고 의미있게 조망하기 보다는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대해서만 소구하는 것은 아닌지.....식민지, 여성이라는 조합만으로도 무수한 이야길 할 수 있을텐데....



결론은 박해일이 맡은 김장한이 혼자 영화를 이끌고 간 느낌...그런데 총알이 안가를 뚫고 바깥에 수백명의 적군이 포위하고 있는데 거기서 애절한 이별을 멋지게 하는건....너무 진부하지 않나....뽀뽀도 하지 그랬어...이와아 진부한거....


사족 1. 고종을 마치 계몽된 근대의 저항적이고 자주적인 군주로 묘사하지만....휴

사족 2. 한편 이른바 우리가 친일파로 부르는 부역자들을 너무나도 단순히 한다. 윤제문이 분한 이왕청 장관 한택수는 해방과 동시에 화끈한 변신을 꾀하지만 이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기회주의, 권력 기생의 부역자들 만큼이나 사회적 다윈주의나 우승열패의 신화, 계몽의 논리에 젖은 확신범 부역자들이 존재하는데 한택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냥 단순한 주인공 괴롭히는 나쁜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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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스데이2 리서전스(2016)



오늘 저녁에 인디펜던스데이2-리저선스(이하 리서전스)를 보고 왔습니다. 몇 가지 생각이 들어 이렇게 짧게 글을 남깁니다.

 

전작의 1996년은 영화를 보던 당시 우리들 모두의 1996년이었습니다.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영화를 보던 그 시점 당시의 우리들의 이야기로 직결하여 독해해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워싱턴에 떨어진 공습은 누구나 그것이 서울, 동경, 타이페이 등에도 떨어졌으리라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서전스의 오늘은 더 이상 우리의 오늘과 다릅니다. 세계는 1996년의 조우를 분기로 우리와 분리되었습니다. 극 속의 그들은 1996년의 우리였지만 리서전스 속의 그들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닙니다.

동시에 영화는 단순히 외계의 불가항력적 공격에 의한 재난을 넘어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려 합니다. 극 속에 지구를 구원하는 중요한 조언자로 나오는 스피어의 존재는 결국 두 차례 침략을 해온 이들에 대한 반격, 그 세계에서 오랜 시간 지속된 우주 전쟁의 복판에 지주권이 개입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독자적인 영화 속 세계관의 구축이란 의미에서 많은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간 롤랜드 에머리히의 재난물들은 연속적 서사 없이 영화 한편에서 끝나는 완결적 서사였지만 이제 에머리히의 영화는 몇 십년에 걸친 인간 승리의 서사를 보여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쉽습니다. 우리가 인디펜던스데이 1편에 느낀 어떤 감정들은 우리가 영화 속의 시공간들을 우리의 당대의 그것과 등치시키고 대입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종의 결전에서도 인간들은 여전히 F16을 타고 사인드와인더를 날려댑니다. 넘볼수 없는 외계의 적은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뜻밖의 변수를 통해 물리칩니다. 즉 영화를 보는 당대 우리들의 평범한 의지들의 총합이 승리를 만들어낸다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그 조우를 계기로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사는 리서전스 속 그들에게 우리가 들어갈 여지는 적어 보입니다. 전작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뿌리를 둔 SF 재난이었다면 이제 영화는 당대라 적고 엄청 먼 미래의 영화를 보는 듯 합니다. 단지 우리는 과거의 흔적을 짚어보고 과거에서 커온 이들의 미래를 걱정해볼 뿐입니다. 에머리히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지만 이 세계의 분리는 우리에게 시공잔적으로 영화에 들어갈 수 있는 여백을 너무나도 죽여버립니다.

 한편 영화는 여전히 전작과 같이 보통의 인간들이 헌신과 리더쉽, 희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 속 많은 장치들은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갑자기 난입한 버스며,너무나도 뻔하게 좌절당하는 1,2차 공격, 뜬금 없는 오쿤 박사의 부활과 너무 많은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복잡함 등은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한편 외계인들의 공격 역시 전작과 다릅니다. 전작의 공격은 인간 문명에 대한 직접적 타격입니다.전작에서 외계인과 대화한 휘트모어는 그들이 지구를 단순히 착취, 수탈할 것이라 하지만 이번 공격은 행성의 코어에 대한 공격입니다. 즉 저들의 궁극적 목표 달성, 전략적 승리를 막기 위한 인간들의 역할이 너무나도 제약됩니다. 고작하는건 저들이 핵이 얼마나 있으면 도달하는지 계측하며 저들을 그냥 공격하는 것 뿐입니다. 또한 스피어의 존재도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재난물을 우주전쟁의 서사로 만드는데 중요한 매개를 맡고 리서전스의 재난을 극복하는 키이지만 그것의 등장 과정 등은 너무 좀 허접하고 당혹스럽습니다. 차라리 스피어의 존재를 해석하고 풀어가서 영화의 끝에서 그것과의 접속을 이뤄내는 플롯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요? 승리 자체는 스피어이 조언이나 역할이 아니라 순전히 평범한 인간들의 노력으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고자하는 어떤 인간애, 희생, 노력, 투지, 의지 등을 더 잘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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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rpa LOVE 2016.06.23 23:15 신고

    현실에 기반한 침략이었던 1탄에서 인류는 무너진 외계의 우주함선으로 부터 외계기술을 습득하여 현실과는 사뭇 다른 타임라인을 구성한 겁니다. 때문에 시공간의 분리는 감독과 작품의 의도였고 그렇게 느끼셧다면 이 작품의 작품성이 꽤 높은가 봅니다. 저도 가서 봐야 겠군요. ㅎㅎ

  2. 꿈꾸는사진기 2016.06.24 00:58 신고

    네 맞습니다. 이는 아어지는 3편을 위한 포석이고 세계의 구축으로 봐야합니다

  3. 꿈꾸는사진기 2016.06.24 00:59 신고

    작품성은 그런 구축 사도와는 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해보입니다.

  4. 꿈꾸는사진기 2016.06.24 01:00 신고

    기본적으로 스타게이트, 인디펜던스데이,투모로우,2012로 이어지는 필모를 계승하지만 그의 이전 대표작과 비교하면....

싱 스트리트(2016)



 

 

  존 카니의 세 번째 음악 영화 <싱 스트리트>를 두 번이나 보고서야 이렇게 단문이나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엄두를 내보게 되었다. 영화는 여러 의미로 데뷔작인 <원스>와 두 번째 작품이자 동시에 가장 상업적 흥행을 이뤄낸 <비긴 어게인> 사이에서 존 카니 본인의 영화적 계보를 이으면서도 이전의 두 영화를 넘어서고 있어 보인다.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화려하고 대단하지 않다. 뭔가 요즘 영화들처럼 복잡하고 중층적 플롯을 가지지도 않았고, 인물들이 막 그렇게 입체적이고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오히려 10대 후반에 갓 들어선 소년들이 자신들의 삶을 구원하고 변화 시키고 나아가는 성장드라마이자 동시에 1980년대 중반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사회, 문화적으로 분열적인 시기를 살아가는 소년들의 이야길 단순하지만 명쾌하고 간혹 무거워 질 수 있는 이야기들을 진중하지만 가볍지 않게 잘 풀어내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영화는 1980년대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다. 아일랜드는 1970년대 북아일랜드 문제로 다시 격화된 IRA와 영국의 격렬한 대치와 경제적 불황 속에서 평화와 경제의 문제를 둘러싼 빈번한 내각 재신임과 의회 해산 등을 경험하는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동시에 오랜 시간 아일랜드의 의식과 문화 기저에서 작동해온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 가톨릭이 여전히 곳곳에서 그 에너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희망은 마치 요즘의 탈조선담론처럼 영국과 같이 비교적 아일랜드 보단 상황이 좋은 인접 국가로의 탈출뿐 이었다. 영화 초반 듀란 듀란(Duran Duran)의 노래 리오(Rio)가 나오는 것은 이런 시대적 맥락을 표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리오그란데 강을 뜻하는 노래인 리오를 선곡한 것은 아이리쉬 해의 세인트조지 해협과 같은 곳을 유비하게끔 하는 장치인 것이다.

  주인공인 코너네 가족 역시 이 경제적 불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는 실직했고, 어머니는 주 3일 근무로 근무 시수가 잘린다. 원래부터 서로 간에 큰 사랑 보단 어떤 의무감으로 가족을 이뤘던 가족은 이 급격한 경제적 기반의 붕괴에 너무나도 무력했다. 주인공인 코너는 자신이 원래 다니던 학교를 높은 수업료로 인해 포기하고 영화의 핵심 배경이 되는 크리스찬 브라더스 스쿨로 전학하게 된다. 학교를 관장하는 수사는 거의 꼴통, 사이코패스 수준의 보수주의와 권위주의, 폭력에 찌들어 있었고, 학교는 이미 그 사회 내에서 사실상 의미를 잃어버린 아이들로 가득하다. 폭력과 괴롭힘은 예사이고 수업에 대한 참여는 엿 바꿔 먹은 지 오래이다.

적어도 이전까지 비교적 안온하고 정제된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코너에게는 마치 거친 야생에 내던져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게이라고 부르는 아이들, 묻지 마 폭력을 행사하는 급우, 악랄하게 권위적인 학교의 최고 책임자는 이미 충분히 지옥 같은 집 바깥의 세계로 학교조차 그의 삶에 어떤 자존과 탈출구가 되지 못함을 드러내준다.

  벡스터 수사의 무자비한 폭력과 인생이 망가진 급우의 폭력에 상처 입고 걸어가던 코너의 눈앞에 구원자, 천사가 나타난다. 학교 앞 여학생 기숙사에 살지만 학생은 아닌 그녀, 라피나다. 코너 보다 한 살이 많은 이 위험한 눈의 소유자에게 코너는 한 방에 넘어가버렸다. 그녀와 말을 섞기 위하여 밴드를 하고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는 거짓말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건 거짓말은 아니다. 코너는 곧장 세상의 모든 악기를 다루는 친구에이먼과 여러 동료들의 도움으로 자칭 미래파 밴드 싱스트리트를 만든다. 이후 영화는 밴드 싱스트리트가 학기 말 디스코 파티에서 라이브 공연을 준비하며 생기는 여러 이야기들, 뮤직비디오 촬영과 작곡, 연습 그리고 코너와 라피나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실 여기 까지 보면 영화는 틴에이지 영화와 음악 영화가 결부된 흔해 빠진 영화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싱스트리트>는 단순히 꼬마가 음악과 사랑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그 이상을 다룬다. 영화는 이제 십대 후반에 접어든 소년들이 경제적 불황과 낡고 억압된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벌이는 사랑과 자존의 투쟁이며 탈주의 이야기다.

 

  우선 영화는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길 할 때 듀란듀란의 리오 뮤직비디오를 보며 코너의 형이자 사실상 이 영화를 이끄는 역할인 브렌든과 아버지의 대화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그들이 뮤직비디오로 나오는 것이 뭔가 숨길 것이 있어서라 이야기하고 비틀즈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한편 라피나의 남자친구와 조우하고 돌아온 코너와 브렌든의 대화를 복기 해보자, 브렌든은 제네시스의 음악이나 듣는 것들이라 폄훼한다. 코너의 아버지와 라피나의 남자 친구는 말 그대로 어른이다. 구시대의 인물이며, 그들은 오래된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벡스터 수사는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세상을 떠난 보위를 연상케 하는 화장과 염색을 한 코너에게 화장을 지울 것을 요구하고 사실상 물고문에 가까운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코너의 화장을 빼앗는다. 실직자 아버지와 마약상인 라피나의 친구,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벡스터는 코너와 친구들이 그리고 과거의 브렌든이 단절하고자 했던 혼란하고 가난하며 불우한 당대의 아일랜드를 보여준다. 미래파는 과거 자신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폭력과 방임에 내던진 아일랜드에 대한 탈주다. 리오는 영국으로의 탈주인 동시에 이 시궁창과 같은 현실에서 자기 삶의 구원이다. 만약 코너와 라피나, 에이먼과 여러 친구들에게 밴드 싱스트리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 길은 고된 길이다. 그들은 지지해줄 부모가 없다. 부모들은 죄다 이혼하거나 별거하며, 실직자 내지 파트타이머이며 심지어 알콜과 약물에 중독되고 조울증에 미쳐가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스스로만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내던져 진 것이다. 그들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은 일견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바닷가 방파제에서 진짜로 바다에 뛰어든 그때 라피나의 말처럼 녹록치 않다. 대충 해서는 그들은 그들의 삶을 구원할 수 없다. 더욱 치열하게 구시대와 단절하며 스스로의 자존과 쓸모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그들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이고, 알콜과 약물에 찌들고 포트폴리오나 평생 만드는 모델로 살아야 할 것이다. 브렌든과 코너가 말하는 행복한 슬픔은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치열함이 주는 어떤 카타르시스이며 동시에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아리고 아픈 투쟁의 감정이다. 영화를 대표하는 노래 가운데 하나인 'drive it like you stole it'의 뮤직비디오 촬영 장면을 생각해보자. 노래를 부르기 전에 코너는 라피나가 오길 기다리며(그녀는 런던으로 먼저 떠났다.) 자신이 그린 뮤직비디오의 영상을 상상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엔 라피나만 아니라 그의 부모도 등장한다. 이미 파국을 맞은 부부가 옷을 차려 입고 파티장에 나타나 함께 춤을 추며 코너를 지지해주는 장면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짧은 상상씬 안에는 형에 대한 코너의 의지와 라피나에 대한 마음 그리고 부모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다. 아직 부모가 필요한 어린 소년이기에 부모의 재회를 기대하지만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상상이란 점, 그리고 그와 그의 형제들이 이미 이 파국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모의 등장은 더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행복한 슬픔은 이 과정이 가진 복잡한 심리...아마 고대의 오이디푸스가 느꼈을 법한 그런 감정들의 총체를 지시하지 않을까?



'위험한 눈을 가진 그녀'

 

  코너와 라피나는 코너의 할아버지가 물려준 작은 보트로 아일랜드를 떠난다. 과거 그들이 이 보트로 야유를 나가며 바라본 아이리시 해를 건너는 정기 여객선의 길, 당대 수많은 아일랜드 청년들이 갔을 그 단절과 탈출의 길을 그들도 따라간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은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그들에겐 사랑과 자존, 단절과 미래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들이 믿는 것은 이전 라피나의 런던행이나 브렌든의 물음처럼 영국의 지인이나 배경, 그들이 가진 돈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연고와 배경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이 역사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존 카니가 화면에 띄우는 그 언명을 기억하라.

 



0. 존 카니는 1972년생이다. 아마 1985년의 그는 이제 우리 나이로 14살 정도 된 학생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코너는 카니의 분신일지 모른다. 카니는 자신의 경험 내지 자신의 아쉬움, 자신의 꿈, 자신의 현실을 코너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존 카니는 1991년 데뷔한 밴드 더 프레임스의 멤버였다. 그리고 이 더 프레임스의 보컬이 바로 <원스>의 주인공이었던 글렌 한샤드다. <싱스트리트>가 존 카니의 어릴 적과 이어진다는 설명 그럴 듯하지 않나? 그렇기에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 영화를 헌정한 것이 아니었을까?

 

1. 이번 <싱스트리트>는 이전의 <원스><비긴어게인>과 시공간을 활용하는 전략이 전혀 다르다. <원스>에서 아일랜드는 굳이 아일랜드일 필요가 없었고, <비긴 어게인>에서의 뉴욕은 뭔가 음악과 예술, 자유와 사랑, 낭만, 상업주의 등을 표상한다면 이번 영화에서 1985년 더블린은 영화를 추동하고 영화의 이야기를 가능케 한다. 1985년 더블린 없는 싱스트리트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영화의 그럴듯한 배경, 물리적 공간으로 영화를 넘어서 당대의 다양한 맥락들과 영화의 이야기를 접합 시키고 이런 맥락들이 영화를 끄는데 역할을 하는 이런 방법이 너무 좋다.

2. 인간은 가능성과 잠재성의 동물이다. 노력과 기회, 선택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3. 이런 영화를 이제 겨우 50만 명이 봤다니...비긴 어게인의 그 저렴한 위로 보다

 

4. drive it like you stole it 보단 the Riddle of the model이나 up이 더 좋다. 사랑스러운 것들




덧 5. 영화의 세번째 주인공은 브렌든이다. 그는 이 가정에서 자유와 꿈을 위해 먼저 투쟁한 '미래파'이며 동시에 이 가정과 사회의 현실에 좌절한 청년이다. 그는 동생을 지지하고 가르치며 동생의 고민과 번민을 들어주는 존재다. 어떤 의미에서 브렌든이야 말로 영화에서 몇 없는 코너와 친구들을 지지해주는 어른이다. 하지만 단순히 단방향적 관계는 아니다. 코너의 변화와 실천은 브렌든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 자신이 이뤄내지 못했던 자유와 자존, 음악과 사랑 그리고 '탈 아일랜드!!'를 이뤄낸 동생을 보는 그의 시선은 그 역시 또 다른 위험한 눈이 되어 감을 보여준다. 위험한 눈은 라피나만 아니라 코너와 브렌든 모두에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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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2015)

최초 게시 및 발행: 2016.5.13 19::47

보론 작성 및 수정: 2016.5.14 03:47

최종 교열 및 재발행: 2016.5.14 12:00


 

<한국판 포스터는 참고로 정말 구리다 이 포스터와 오리지널 포스터가 더 좋다>


 영화 <브루클린>은 1950년대 브루클린으로 이주 온 아일랜드 여성 에일리스 레이시의 이야길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아일랜드에서 언니인 로스의 조력으로 더 나은 삶,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에일리스가 이곳에서 향수병을 앓고, 새로운 삶을 견뎌가며 공부와 일, 연애를 병행하면서 브루클린에서의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과 언니인 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급거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돌아온 아일랜드에서 에일리스가 내린 어떤 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많은 이들은 영화를 잔잔한 멜로 드라마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렇다. 영화는 분명 멜로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영화의 멜로적 속성은 이 영화의 포장지이며 동시에 중요한 매력 포인트 중 하나이다. 토니와의 우연한 만남과 에일리스가 다니는 야간 대학 정문에서 기다리던 토니와 에일리스의 대화는 사랑스럽고 귀엽기 그지 없다.(작가와 번역가가 이 사랑스러움을 잘 살렸다는 생각이다.) 처음 겪어온 사랑이란 감정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중간에 아일랜드 귀국에서 흔들림을 겪는 과정(그 흔들림의 대상이 무려 어바웃타임의 팀이다! 그러고 보니 시얼사 로넌과 도널 글리슨은 둘다 아일랜드인이다 ㅋ)은 이 영화가 어느 여성이 자신이 놓인 두 세계의 멜로 사이에서 갈등하는 영화인것 처럼 보이게끔 한다. 하지만 <브루클린>이 정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멜로물로 분류 가능한 영화일까? 솔직히 난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보고 싶다. 영화를 소개하는 마케팅 전략과 한국판 포스터는 영화의 멜로적 속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영화의 큰 줄기는 사랑의 문제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흔한 멜로영화와 다른 어떤 요소들이 추동하고 있다. 난 멜로가 이 요소들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어떤 감정이입의 기회와 더불어 두 가지 표상체계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설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에 이 영화를 단순한 멜로물로 이해하기 보단 대중적이고 연성화된 젠더 영화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많은 설명력과 타당성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영화를 연성화된 젠더 영화, 여성 해방과 자유의 서사로 볼 수 있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영화 속에서 에일리스에게 아일랜드는 보수적 카톨릭의 전통과 농촌 공동체가 만나 만들어낸 구조 체계이다. 이 아일랜드라는 체계는 폐쇄적이고 관습의 이름으로 연성화된 억압과 제약이 작동하고 있는 공간이다. 극중의 대화를 반추해보면 에일리스는 똑똑한 여성이지만 아일랜드에서 일자리를 갖지 못해 사실상 명예남성에 권위주의와 가톨릭 보수주의에 찌든 켈리 여사의 '시덥잖은 식료품점' 종업원이나 하고 있다. 하지만 회계사로 있는 로스 언니(언니는 이 사회의 일반적인 표상 체계 외부에 있는 인물로 봐야 할것 같다.)의 조력으로 그녀는 브루클린으로 떠난다.

  비록 브루클린에서도 아일랜드 이주민 커뮤니티에 속해 있지만 그곳은 아일랜드 본토의 그것에 비해 훨씬 세속화 되었고 자유로운 공간이다. 여전히 그곳에도 아일랜드인들의 카톨릭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아일랜드계 이주 여성들의 하숙집을 운영하는 키호여사는 독실한 신자지만 본토의 켈리 여사와는 완전히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런면에서 브루클린이란 공간은 아일랜드와 비교되는 구조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아일랜드에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사랑을 얻지 못하였으며 가톨릭적이고 전통적 농촌 공동체의 구조 속에 잡혀 있었지만, 브루클린에 오며 그녀는 더 나은 삶이 가능한 구조 속에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가톨릭 교회의 신부와 언니의 조력이 있었지만 그곳으로의 이주와 그곳에서의 생활은 온전히 그녀의 선택의 결과였다. 즉 브루클린으로의 이주 자체는 억압적이고 숨 막히는 생활에서 선택을 통한 벗어남이었다.

  당장 켄 로치의 <지미스 홀>과 같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20세기 초중반 아일랜드 농촌 사회의 현실에서 여성, 그것도 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여성의 삶이 어떠하였을지 반추해보길 바란다. 만약 켄 로치가 재현해낸 그 공동체의 현실이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전제하면 앞에서 말한 구조 체계, 표상 체계로 <브루클린>의 아일랜드를 이해하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브루클린과 아일랜드라는 두 개의 삶의 구조를 비교하여 보여준다. 아일랜드는 심적으로 안온한 봄햇살 같다. 가족과 친구가 있고 익숙하고 그리운 공간이지만 여전히 그곳은 그녀를 억압하고 제약하는 관습과 장치들로 가득하다. 그곳에서는 시선들 조차 그녀를 제약한다. 하지만 브루클린에서는 자유로운 사랑과 더 나은 삶의 기회가 존재하며 동시에 그곳에선 그녀가 져야할 책임들이 존재한다. 마을로 돌아와 다시 만난 켈리여사에게 에일리스가 말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잊었었다."라는 말은 친구와 가족이 주는 안온함과 버무려져 그녀의 삶을 다시 잠식하려던 이 아일랜드의 구조에 대한 자각이 아니었을까? 아일랜드-브루클린-아일랜드 그리고 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는 이 '신화적 여정'은 에일리스에게 주체적 인간, 생동하는 욕망이 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과정에서 에일리스는 종교와 세속, 은근한 강요와 제약-자유로운 선택과 책임, 관습과 자유, 표상 체계 내에서의 소극적이고 대상화된 여성-자유롭고 욕망을 가진 주체 사잉서 투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에일리스의 모습은 한편 동시대 뉴욕이란 배경을 공유하는 영화 <캐롤>에서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의 모습과도 묘하게 비교된다. 세 사람 모두 당시 주류 사회가(단 그들이 놓인 주류 사회가 공간적으로 다르다.)가 요구하는 표상체계에 대해 맞서는 사람들이다. 케이트 블란쳇에서 그것이 남편과 루니 마라 사이였다면 에일리스에게 그것은 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런 구조와 구조 사이에서의 내적, 외적 갈등의 구조로 이 영화를 풀어 본다면 이 영화는 마냥 잔잔한 멜로물 보다는 그 잔잔함 속에 뭔가 큰 에너지가 응축된 '자유와 주체성을 위한 저항의 과정'이 담지된 영화로 보는게 좀 더 온당하지 않을까?

  한편 영화는 19세기 후반 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아일랜드나 이탈리아 등으로 부터 미국을 향해 전개된 거대한 이주의 역사를 반추하게 해준다. 에일리스가 브루클린의 아일랜드 교회 커뮤니티에서 우리가 아는 현대 뉴욕의 초석을 닦은 아일랜드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과정에서 한 아일랜드 노인이 구성지게 부르는 아일랜드 민요, 영화 초반 브루클린에서 적응을 위해 분투하는 에일리스의 모습 같은 장면들은 이 영화가 충분히 당시 미국 문화사이자 이주사의 한 장면을 반추하게하는 부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내겐 이주의 경험이 없다. 내 인생에 내 고향이자 삶의 터전 대구를 떠나 가장 오랜 시간 체류한 것은 16년 전 병으로 입원한 서울대 병원에서의 만 2달여가 전부이다. 그런 나이기에 이주의 경험은 언제나 동경과 탐구의 대상이다. 문득 영화를 보며 브루클린에 처음 도착한 에일리스의 모습에서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들이 그곳에 처음 발 디뎠을때 그 마음은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 원본에서 영화 <브루클린>에 담긴 연성화 된 젠더물의 속성과 이주와 이산을 다루는 영화라는 두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이주와 이산의 문제에 대해 추가적인 언급이 필요하다 판단되어 아래의 보론을 첨한다.


에일리스의 고향은 어디인가?



<정말 이 포스터..얼마나 예술인가?>


  영화 <브루클린>의 극 속에서 에일리스는 고향을 등 진 자이다. 비록 고향을 등지는 과정, 언니와 엄마와 이별하는 과정, 자체는 비록 적극적인 억압과 배제의 산물은 아닐지언정 어쩌면 그 이주는 극 중에서 묘사되는 아일랜드의 보수적 가톨릭-촌락 공동체가 주는 어떤 질서와 구조가 만든 필연성의 결과에 가깝다. 즉 에일리스는 똑똑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여성이지만 보수적인 이 촌락의 대면사회의 관습과 구조 체계는 에일리스에게 한 사람의 주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아 그녀에게 허락되는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주체적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 이 보수적인 가톨릭-촌락 공동체의 표상 체계 내에 존재하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공간일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언니 로스의 조력으로 공간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생애 처음인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여객선을 타고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녀가 정착한 뉴욕의 브루클린은 그녀에게 사실상 어떤 연고도 기반도 없는 타지이다. 비록 아일랜드계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우리가 아는 현대적 뉴욕의 외형을 아일랜드계 이주자들의 노동이 빚어냈을지언정 브루클린은 아일랜드가 아니었다. 비록 아일랜드계 커뮤니티의 보호를 받고 그곳 신부의 도움으로 직장과 거주지(아일랜드계 여성들의 집단 하숙집)를 획득하고 (언니 로스를 이어) 회계와 경리를 배우는 대학에 다니게 되다. 물론 여전히 그녀는 이산과 이주가 주는 괴로움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공간은 어디인가?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한다. 그녀는 어디에서 인간으로, 주체로 설 수 있는 공간을 받았는가? 그건 아일랜드가 아니라 브루클린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 그동안 제약받고 외면 받아온 자신의 잠재성, 사랑, 주변의 진심 어린 환대를 경험하였다. 물론 그것이 타자를 향한 절대적 환대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러 의미에서 에일리스는 브루클린, 미국이란 공간이 주는 어떤 환대 체계 내에서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회계에 재능과 뜻이 있고, 훌륭한 문자 해독능력과 쓰기 능력을 가졌으며(놀랍게도 그의 반려자 토니는 거의 문맹에 가깝다), 머리가 좋고 적응력이 좋기 때문에 얻은 환대이며 기회일지 모른다. 즉 아일랜드에서 그녀를 제약하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가톨릭-촌락 사회의 구조와 지금 브루클린의 구조 사이에서 그녀가 기입되는 어떤 사회적 의미와 값이 다르기 때문에 그녀가 환대 받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미국으로 올 수 있게 한 로스 언니와 신부 그리고 이곳에서 정착을 지지하는 키호 여사의 노력과 애정, 토니와 그 가족들의 사랑 더 나아가 미국행 배에서 그녀에게 도움을 준 여인의 호의와 환대는 앞에서 말한 그런 류와 또 구분되는 종류의 환대 아니었던가??

  에일리스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롭고 안온한 고향을 떠나서야 환대 받고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과연 고향이란 어디일까? 그녀가 미국에 발 딛은 초기 그녀의 고향은 아일랜드였겠지만 돌아온 아일랜드에서 떠나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그녀의 고향은 더 이상 아일랜드가 아닐 것이라 짐작해본다. 고향은 마냥 태어난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어떤 계기를 획득한 공간, 주체이자 인간으로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게 된 자존을 획득한 공간 그곳이 바로 고향이지 않을까? 이어지는 맥락에서 아래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이야기의 서사는 "주체로서 사람 됨을 획득하는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돈 많은 상인인 욘씨네 집 마당. 한 신사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 신사는 망원경이건 주단이건 삼두()마차건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은 모두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직 어려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모르는 실레밀은 그 재주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부러워하는 모양을 지켜본 신사는 실레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그 멋진 그림자를 내게 주신다면, 이 행운의 주머니를 당신에게 드리지요. 이 주머니는 원하는 것은 아무 것이나 얻을 수 있는 주머니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의 그림자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불필요한 것보다는 쓸모 있는 주머니가 얼마나 값진 것 인가. 그렇게 생각한 실레밀은 그 교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실레밀은 그 회색 신사에게 자기의 그림자를 넘기고, 그 대신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그림자란 그렇게 쓸모 없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가 없는 실레밀은 모든 사람들한테서 놀림을 받게 되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외톨이가 되어 아무도 친구가 되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쓰라림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아가씨 미나한테서 백작으로 오인되어 약혼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전에 그의 하인으로 있던 성질이 비뚤어진 라스칸에게 배반당하여 그림자가 없다는 비밀을 미나에게 들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미나의 순수한 사랑조차 라스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약속 기한이 지나자 그 회색의 신사는 다시금 나타났다. 그는 실레밀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그림자도 그리고 그 행운의 주머니도 드릴 테니까 당신의 영혼을 내게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지금까지 자기가 거래해 온 회색의 신사가 사실은 악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실레밀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말았다. 그는 그 행운의 주머니조차 산골짜기에 집어 던져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었다. 실레밀은 자기에게 남아 있던 돈 전부를 털어 헌 장화를 하나 사서 신었다. 그러자 그 장화의 이상한 힘으로 그는 나는 듯이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실레밀은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고, 외롭기는 하지만 고요한 행복을 거기서 발견할 수가 있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림자를 판 사나이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 4. 1., 가람기획)


  2015년 상반기에 나온 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의 서문에서 인용되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대한 네이버 지식백과의 요약이다. 문득 여기서 그림자와 악마, 장화의 비유가 브루클린에 왔다가 다시 아일랜드로 간 이후 브루클린으로 돌아오는 에일리스의 여정과 유사하게 읽힌다. 김현경은 여기에서 그림자를 사람됨을 수행하기 위한 스티그마로 유비했다. 에일리스에게 사람됨의 스티그마는 무엇이었을까?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남자는 악마에게 보물주머니를 댓가로 그림자를 팔았지만 에일리스는 그 어머니가 주는, 모국이 주는 안온함과 친구인 낸시, 새롭게 그녀를 설레게 하는 짐 페럴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새로운 삶, 잠재성의 삶, 자신이 선택한 토니와의 사랑이 있는 땅 브루클린을 포기할 뻔 한다.(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림자를 팔았기에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에 실패한다. 멋진 그림자가 없는 이에게 딸을 내어줄 부모는 없다면서) 그녀가 하나의 유기체로 형성되고  공간은 아일랜드였지만 그녀에게 사람됨을 부여한 공간은 브루클린 아니었을까? 결국 남자가 그 마술 주머니를 포기함으로써 자유로워지고 또 다른 사람됨의 기회를 얻었듯이 에일리스 역시 태어난 곳으로서의 고향을 포기하여 외롭지만 참 된 인간 됨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아 물론 우리의 팀...아니 짐 페럴은 매력적이지만..)

  영화는 이런 맥락에서 어떻게 하나의 게젤샤프트(Gesellschaft)이자 이주자들의 도시인 뉴욕(의 브루클린)이 어떻게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주체성을 획득하게 하는지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그곳은 도시화된 공간이며 이익과 이해, 필요에 바탕한 사회이기에 누군가의 인신과 그가 위치해있는 표상 체계에 무신경 하다. 오히려 그 적정한 냉담이 있기에 그곳의 사람들은 에일리스가 어느 교회에 다니며, 누구의 딸이며 누구의 여동생인지, 누구의 친구인지와 같은 질문으로 부터 자유롭고 그렇기에 오히려 그녀가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천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토니와 짐 사이에서 흔들리는 과정에서 '어른'들의 상이한 역할은 호혜성과 밀도 있는 관계로 뭉쳐진 아일랜드의 농촌 사회가 호혜성과 윤리, 관습의 이름으로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제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오히려 끈끈하고 들러붙은 연대 보다 느슨한 연대와 환대가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 지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브루클린>은 보수적 가톨릭-촌락 공동체라는 공간으로 부터 벗어남으로써 벌어지는 여성 해방, 인간 자유의 이야기를 사랑과 이주, 커뮤니티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영화이다. 우리는 그 영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멜로의 구조에 주목하지만 이 영화는 그 내부의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더 다양한 이해와 해석이 가능한 영화이다. 그렇기에 <브루클린>을 본 많은 이들은 이 영화를 마케잉 된 '멜로'로 부터 벗어나 좀 더 다양한 맥락 속에서 봤으리라 기대해본다. 영화는 그래야 재밌어지는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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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띵 2016.05.23 12:24 신고

    포스터부터 보고싶은 느낌이 물씬ㅎㅎㅎ

TVN 드라마 기억의 15편과 16(최종화)를 보았따.

 

아마 언젠가 부터 박태석이란 사람의 삶과 경험에서 묘한 공통점을 본것 같다. 어느 순간 부터 그가 그의 가족과 동료 사이에서 나오는 그 감정들을 훌쩍이면서 보고 있었다. 식당을 하는 어머니를 막연히 입구에 기대서서 보던 모습. 기자들 앞에서 알츠하이머로 인해 판단을 잃고 어찌할 줄 모르는 순간 손을 잡고 박태석을 구한 그의 아버지 등등...하필 머리 속의 그것이 문제라는 정도 외에 별 비슷한 것 하나 없지만...그런데서 16년 전 나를 보고 있었던것 같다.

 

마지막에 불행은 언제 어디선가 나타나며, 그로 인해 삶이 끝났다고 절망하는 순간에 또 다른 시작이 있다는 그 말은...참 한동안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래도 나도 지금의 (별거 아닐지언정) 삶을 가능하게 지지해주는 이들 모두의 사랑을 기억하고 싶다. 그래 우리는 기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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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후(45 years, 2015)





왼쪽은 원작 포스터, 오른쪽은 한국판 서브 포스터(둘 다 너무 좋다)



  2014년에 참 몰입해서 봤던 영화<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프라우도의 여동생 아드리아나의 나이 든 역을 맡았던 샬롯 램플링과 프라우도의 레지스탕스 동료 주앙의 나이든 배역을 맡았던 톰 커트니 두 사람이 부부로 만났다.(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생각하면...친구의 여동생, 오빠의 친구 사이였던 아드리아나와 주앙이 결혼했다면 대충 실제 이 영화의 부부 정도 연배가 아니였을까..소름)


  <45년 후>는 무척 목가적인 공간, 무채색의 배경 속에서 평범한 노년을 살아가던 머서 씨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영화이다. 두 사람은 다가오는 토요일이면 결혼 45주년을 맞는다. 부인인 케이트 머서는 과거 남편인 제프 머서의 질병으로 치르지 못한 40주년 결혼기념일을 대신해 45주년 기념파티를 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러던 와중 남편인 제프에게 과거의 스위스 산악 등반 중 사고로 실종된 연인(내지 동거녀?)의 시신이 긴 시간(두 사람이 결혼한게 45년이란걸 생각하자)을 지나 설산의 빙하 속에서 냉동된 채 발견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온다. 영화는 다가오는 토요일의 결혼기념일 파티를 앞두고 6일 간 두 부부가 겪는 심리의 변화를 중요한 얼개로 삼고 있다.


  스위스에서 오래전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 빙하에 속에 얼어버린 연인의 소식에 제프는 흔들린다. 그는 끊었던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스위스로 떠날지 여부를 고민한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독일어 사전을 창고에서 꺼내고 다락방에 올라가 오래된 연인과의 사진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제프의 심적 변화를 케이트는 불안과 질투가 결합된 묘한 감정으로 바라본다.

  45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둘은 서로에게 각자가 바랬던것 같은 '온전한 하나'는 아니었던것 같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나누고 싶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 자체의 존재론적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없다. 공유하고 싶지만 공유되지 않는 그 지점은 언제나 우리에게 균열과 두려움, 상상과 추측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제프는 아마 여전히 케이트를 사랑하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그 사고에 대한 죄책감과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발견 되었다는 연인의 모습에 심적으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자신의 심정을 구태여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굳이 언어적 설명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이해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을까? 자신이 발견 된 옛 연인에 대한 이야길 하며 일상에서 흔히 목격되는 그런 전제들을 달지 않는 것은 과거의 기억과 옜 연인에 대한 몰입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케이트에 대한 무언의 신뢰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불안하고 혹시나 그녀를 찾기 위해(정확히는 수십 년 전의 모습 채로 빙하에 갇힌 그녀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에 가지나 않을까 걱정되고 옛 연인과 사이의 이야기를 술술 이야기 하며 보이는 남편의 변화가 불편하다.

  영화는 어떤 절정도, 뭔가 화려하고 거대한 분출 없이 제프와 케이트의 스쳐가는 표정돠 동작 하나하나에 이 균열과 불안을 숨겨 보여준다. 얼핏 보면 그냥 단지 한 노부부에 대한 밀착 다큐멘터리 같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나타나는 (주로 케이트의) 동작과 표정,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더욱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순간에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 처럼 보이는 그런 작은 것들이 시간과 함께 쌓여가며 질적으로 다른 감정들을 만들어 간다.



주변의 경험들을 통해 감히 짐작해볼 수는 있지만 아직 내겐 너무 먼 이야기일려나. 45년을 한 이불을 덮은 사람이 며칠 전의 그 사람이 맞는지 혼란스러운 그런 마음


영화에서 더 플래터의 Smoke get in your eyes가 계속 나온다. 마지막 엔딩도 함께하는데 이 노래...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씌임에 대한 경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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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는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본 첫 마블 시네마의 메인 스토리 영화다. 데드풀을 보았지만 주변의 마블 매니아들의 평들을 모아 반추해볼때 데드풀은 아마 마블 세계관의 주요 서사는 아닌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블 세계를 구성하는 서사의 가장 큰 줄기는 사실상 처음 접했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명절 특선 영화로 아이언맨 3편을 보긴 했지만 이 거대한 세계의 이야기와 인물관계, 구도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오로지 우연히 본 철남자 3편과 지속적인 대차대조와 그동안의 얄팍한 귀동냥 눈동냥을 통해 포착한 것들을 조합하여 인물들의 구도를 그려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척 아쉬운 지점이다. 기회가 된다면(아마 그럴 일 없겠지만) 마블 시리즈의 주요 영화들을 정주행 해보면 어떨까?


  영화는 이른바 스코비아 협정이라 불리는 특수 능력자에 대한 국제적인 규율 장치를 둘러싼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결을 내세운다. 극의 초반 스펙타클한 나이지리아에서의 액션신과 그것의 비극적 결말은 이전의 맥락을 모르더라도 충분히 극의 이야기를 스코비아 협정 국면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스코비아 조약, 어벤저스 성원들의 능력을 국제적 제도에 귀속시키고 그 활용을 제약하는 이 제도를 둘러싸고 미국 대장과 철남자가 대립하는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의 대립은 무척 중요한 자유주의와 책임의 문제에 있어 무척 흥미로운 함의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어떤 깊은 논의나 숙고를 거치지 않는다. 단지 이 고매한 자유주의와 책임을 둘러싼 논지는 두 주인공들의 대립과 충돌, 상호 이해라는 서사를 정당화 하는 도구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문제에 대해 영화가 숙고하고 내적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바랬지만 돌이켜보면 이 영화가 마블 시리즈란 점에서 이런 기대가 오히려 잘못된 요구가 아니었던가 싶다. 애시당초 겨울 병사, 미국 대장, 철남자 사이의 이런 철학적 문제는 감독의 몫에서 이 지점을 캐치한 일부 관객들의 몫으로 떠넘겨졌던 것은 아닐까


  눈요기는 충실하다. 오프닝 시퀸스인 나이지리아 라고스 시내에서의 장면도, 영화의 중요한 대결 구도를 보여주는 공항 액션신도, 미국 대장이 겨울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특수부대와 별이는 아파트 액션신도 눈 요기는 화려하다. 단 이야길 풀어가는데 있어서 후반부에 들어 철남자의 심적 변화를 설명하는데 더 많은 설명력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주변의 혹자는 미국 대장 시리즈가 마블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이야길 내포하고 있다고 하던데...이걸 처음부터 볼 일이 생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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