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공포의 시대를 건너기 위하여(대구신문 16.6.21)


이시훈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본색 소사이어티 대표)


조 콕스에 대한 추모 행렬(원출처 AFP/ 한겨레에서 인용)


  전 지구가 혐오와 공포, 분노와 배제가 만들어내는 어둠에 잠식당하고 있다. 경제적 불황의 구조화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분배 구조, 고착화된 실업은 분노와 좌절이 자라날 씨앗을 배태하였다.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이뤄진 금융화와 시장화, 유연화는 우리 삶을 부채에 옥죄인 불안정한 삶으로 몰아넣었다. 인류가 1789년 이래 200년 이상에 걸쳐 축적하고 쟁취해온 민주주의, 타자에 대한 존중과 관용, 다원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한 해체 등은 이런 위기 속에서 급격하게 자라나는 혐오와 분노, 좌절과 공포의 정념 앞에 그 위협 받고 있다.

  며칠 전, 브렉시트(Brexit) 문제로 격한 정치적 투쟁이 펼쳐지는 영국에서 노동당 하원의원인 41세의 조 콕스가 지역구 주민 간담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피습 당하여 살해당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인권, 구호 운동가였던 그녀는 EU 잔류를 호소하였고, 그녀를 습격, 살해한 범인은 영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극우파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적 실험인 유럽연합은 경제적 침체와 급증하는 난민의 압력 속에서 극우파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서쪽으로 지브롤터에서 동쪽으로 레스보스와 키오스섬에 이르는 광대한 지중해를 건너오는 난민의 행렬에 유럽은 통합 실험은 물론 가장 선진적인 유럽의 민주주의와 관용, 사회적 다양성과 다원주의 역시 시험대에 올라서 있다. 

  이런 현상은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저급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유력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 되었고, 티파티와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설파하고 있다. 영국에선 극우파인 영국독립당(UKIP)가 득세하고 있고 지난 프랑스의 광역지역 선거의 1차 투표에서는 극우파 국민전선(FN)이 압승을 거둬 프랑스의 기성 양당을 충격에 빠트렸다. 최근의 오스트리아 대선에서도 극우파 자유당이 1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스의 극우 황금새벽당은 나치즘을 사실상 표방하며 준군사조직을 조직, 테러와 암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우리의 현실 역시 멀지 않다. 이미 일상 공간에서도 여성, 소수자 등 타자와 유색인종에 대한 적대와 혐오, 불신과 공포가 확산되고 내면화되고 있다. 지난 517일 새벽 강남역 공중화장실에서 여성혐오-묻지마 범죄에 희생당한 여성은 범인과의 연고나 일면식도 없이 단지 그 시간, 그곳에 나타난 여성이란 이유로 차디찬 화장실에 쓰러져 꿈과 표정을 빼앗겨야 했다. 범인은 단지 여성에게 무시당한 경험을 이유로 그녀를 죽였다고 이야기 했다. 비록 한국의 경찰은 그의 정신병리학적 문제를 원인으로 설명하였지만 한국의 맥락에서 이런 범행을 개인의 정신병리적 문제로 치부하긴 힘들어 보인다. 이미 세월호 참사 이후 넷우익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혐오와 배제, 공포의 정념은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피로와 좌절과 결합되어 확산되고 있고, 특히 한국의 반공주의적, 인종주의적 배경과 맞물려 더 강한 에너지를 내고 있다. 심지어 보수정권은 이러한 혐오와 공포, 배제의 열정을 정치적으로 조장하고 동원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트럼프나 극우파의 대두는 마냥 먼 남의 나라 이야기라 외면하긴 힘들어 보인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과연 이런 새로운 반동의 역사에 유의미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답은 무척 회의적으로 보인다. 그간 사회의 일부 마이너한 집단의 의식이나 정서라 저평가된 혐오와 공포, 증오와 배제는 경제적 불황과 일상의 불안정화, 이민과 난민의 유입 속에서 확산되고 내면화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이에 대처할 역량은 점점 취약해져간다. 민주주의는 일부 선거 전문가들과 여론조사 전문가, 직업 정치인들의 것으로 전유되고, 대중은 정치와 공적 문제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관용은 어느새 타자에 대한 무시나 무관심과 등치되어 읽히며, 다원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항구적 승리를 선언했던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는 전환과 위기의 종착지를 향해가고 있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타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와 개방, 고통 받는 이에 대한 응답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혐오와 공포에 맞서는 환대와 연대, 신뢰를 바탕으로 생활공간을 조직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경제적 호황과 부의 증진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주의는 경제적 불황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전 지구적으로 과거와 같은 경제적 성장과 호황의 전망이 어두운 시점에 서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맞는 정치를 형성하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조직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혐오와 공포, 분노와 배제 그리고 그 태반으로 불안정과 불균형에 맞서는 길일 것이다. 정치가 새롭게 정의되어야만 우리의 삶은 변화할 수 있다.

 


1. 전 세계의 기성 정치는 장기 빈곤과 긴축의 시대에 양극으로 부터 도전 받고 있다. 트럼프, FN, 시리자, 포데모스 어제 이탈리아 지방 선거의 오성운동까지 기존 20세기의 정치적 유산들에 대한 강력한 의문과 공격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일찍히 우리가 경험한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이종있다고 본다.

2.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단순히 권력구조와 정치구조를 규정하는 협애한 의미가 아니라 믿는다. 우리 삶의 태도와 정서, 의식과 규범, 관념, 관계에 광범하게 작동하고 구성하며 조직하는 체계이고 원리다. 하지만 역시 이전 시기의 이 유산 역시 위협받는다. 걸거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많은 요인들에 맞서도록 유효하게 재규정하고 재조직할수 있는 틀도 제공한다면 그건 마냥 과거의 유물로 기각되어선 안되리라 믿는다

3.불황과 실업, 빈곤과 분노의 시대에 우리는 뭘 어째야 할까

노란봉투와 노란봉투 사이

 

이시훈




 

 

늦은 밤 집에 돌아 와보니

야윈 아내 거치른 손으로

편지가 왔노라고 내미는 노란봉투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지

등줄기에선 식은 땀이 흘러

조심히 뜯어 본 노란봉투

 

<귀하는 해고되었음을 통보합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창백한 형광등 불빛

눈물이 흘러 가슴에 흘러

주먹이 불끈 떨리네

세상아 이 썩어빠진 세상아

맘 놓고 일할 권리마저 없는

세상아 이 미쳐버린 세상아

뒤집어 엎을 세상아

병들어 누워계신 어머니

무슨 일이냐 물어 오시네

한구석 겁에 질린 딸아이

얼굴이 샛노래 지네

 

백자 곡, <노란봉투>

 

 

  근래 SNS에선 4만 7천원이라는 제법 구체적인 돈 단위를 자주 볼 수 있다. 4만 7천원, 셔츠나 청바지를 괜찮은 옷 가게에서 한두 장 사서 입거나, 근사한 식당에서 좋은 밥 한 끼 하고도 남을 것 같은 이 금액의 뒤엔 항상 노란봉투라는 이름이 따라다닌다. 노란봉투, 그것은 바로 쌍용자동차의 매각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사측과 경찰이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가한 손해배상 가압류 47억원과 그에 관한 시사IN 기사에서 시작한 모금운동을 의미한다.

  1970년대 미국 주도의 세게 경제 체제가 재편되었다. 이른바 브래튼우즈 체제로 불리던 전후의 세계경제 질서는 1971년 이후 급격한 해체와 재편을 맞이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대두였다. 한국전쟁 이후 지루하게 이어진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국가 주도의 발전국가의 길을 걸으며 제법 온전한 경제발전을 경험한 한국이었지만, 세계화라는 수사로 포장된 이 새로운 변화 앞에선 한국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1990년대에 들어 급격히 들어온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1997년 겨울 이른바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충격파를 통해 극적으로 그 면모를 드러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한국 경제 체제의 본질은 바로 노동시장 유연화와 시장중심의 경제 구조, 금융자본의 자립화, 공공부문의 축소에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오랜 경제 성장 과정에서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위기와 충격 앞에서 다시 희생을 강요받았다. 전통적인 의미의 평생직장은 사라졌으며, 거리엔 실업자와 구직자, 파산자들이 가득했다.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라는 이전 시기 낯선 단어들이 언론의 주요한 면에 가득했다. 민중가요 부르는 백자의 노래 <노란봉투>에서 보이는 해고를 통지받은 노동자의 찰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의 일상 곳곳을 스쳐갔다.

  이런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문제가 바로 연대의 상실이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 바닥이 보이지 않는 추락이 항상 예비 된 시대를 사는 이들이 겪은 생존의 위기, 실존의 위기 앞에서 우린 점점 연대성을 상실해갔다. 삶의 방법은 연대와 협력에서 각자도생으로, 경쟁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너의 고통은 더 이상 연대하고 함께 나눠져야 할 고통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우린 그렇게 서로의 고통에 무뎌져 갔다. 그 연대성과 상실과 고통에 대한 무뎌짐이 무서웠던 것은 어느 개인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에 가득 찬 공기마냥 우리 사회, 우리 일상에 그것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는 본질적으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너와 나라는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부단한 인정과 이해, 투쟁, 고민과 독해를 요구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 하지만 한국의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그 타자성과 연대성을 위한 고려를 지극히 귀찮고 번거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우린 그렇게 너의 고통을 외면하는 법에 익숙해졌고, 그것의 편안함에 눈 뜨게 되었다. 철거와 폭력에 맞서 권리금이라도 지키려다 뜨거운 화마에 휩싸인 용산의 평범한 작은 식당의 사장님도, 최루액을 맞아가며 일할 권리를 위해 싸우던 노동자들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긴 어느 이름모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삶의 터전을 위해 싸운 강정과 밀양, 청도의 할매들에게도 우린 그렇게 무뎌져갔다.

 

그리고 우리가 외면하던 그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고를, 강제철거를, 파산을, 가압류를 알리는 노란봉투를 맞이했던가...

 

노란봉투와 4만 7천원, 학생들에겐 큰 부담이 될지 모르지만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라면, 소상공인이라면 술값 한번 아낀 돈일 것이다. 그리고 그 4만 7천원들이, 그리고 학생들의 4,700원들이 모여 쌍용차 손해가압류와 싸우고 있다. 이것은 우리 생각하는 그간의 운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다. 그간 우리에게 운동은 적대가 존재하며, 타격의 대상이 존재하는 운동이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투쟁이 있었고, 그것은 늘 뭔가 어렵고 아픈 것이었다. 그리고 노란봉투는 이른바 ‘힐링’과도 다른 정서를 지닌다. 비록 그 자체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힐링’과 노란봉투는 일견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낙오할 위기에 처한 청년들에게, 고통의 일상화 속에 아픈 대중에게 막연한 인내와 단말마적인 고통의 완화를 제시하는 ‘힐링’과 노란봉투는 그 본질이 다르다. ‘힐링’에 타자에 대한 연대가 존재하는가? ‘힐링’에서 고통은 온전히 나의 것인데, 과연 고통에 타자가 들어올 공간이 존재하는가? 도리어 ‘힐링’은 그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고 그 고통을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환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노란봉투와 4만 7천원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바로 연대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하는 작은 과정이며, 비록 노란봉투에는 적대와 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 했듯 구조의 문제를 해결 할 힘도 없다. 하지만 노란봉투와 4만 7천원에는 구조와 체제에 대한 저항을 위해 필요한 연대의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너에 대한 인식과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 연대의 힘이야 말로 권력, 돈, 물리력과 같은 물적 토대를 갖지 못한채 고통 받는 이들이 실존을 온전히 지킬수 있는 힘이다.







서울에서 문화운동 하는 후배들의 웹진인 뮤니에 글을 실어달라해서 뚝딱하고 하나 써서 보냈다. 그게 어제 올라왔기에 트랙백으로 여기에도 하나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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