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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대학 권력의 해체와 포스트 아카데미에 관한 잡념

대학 권력의 해체와 포스트 아카데미에 관한 잡념

 

 

이시훈

본색 소사이어티 대표,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들어가며



본색 소사이어티가 만들어진 이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최초 모임(장기적으론 단체화를 준비중이다.)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에서 그 성격과 형태, 지향에 관한 광범한 논의와 집담들이 있었지만, 아직 명백하게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 가능한 형태의 것이 도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 합의된 구호로서 Post-Academy, Post-Forum이 존재한다. 이 글은 하나의 테제로서 포스트 아카데미에 대해 정립하기 위한 단초로 쓴 글이다. 몇 편을 이어서 쓸 생각이지만 이게 언제 끝날지는 장담할 수 없다.


 

 

 

 

 

Post-Academy에서 포스트는 익히 알듯이 '탈(脫)' 혹은 '후(後)'의 의미를 지닌다. 둘은 다른 뜻을 가지지만 결국 드러내는 것은 한 가지다. 포스트가 수식하는 것의 어떤 문제와 모순으로 부터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포스트 아카데미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의 문제가 규명되어야 한다.

 

 

우선 돌이켜보건데 난 아카데미의 사멸을 바라지 않는다. 전국의 주요 대학에서 교수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그것은 비단 일부 정신 나간 이들의 이상행위에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이번 모 대학 교수는 자기 제자를 구타하고 인분을 먹이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고, 교수와 제자(학부생이건 대학원생이건) 사이의 성폭력 사건, 전임 교원 임용을 매개로 한 뇌물 사건 등은 이제 그다지 새롭게 들려오지 않는다. 물론 내가 그리고 이 글을 볼 또 다른 '나'들이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에 속할 대학에서도 이런 일들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 개인에게 대학의 기억은 남다르다. 난 적어도 영남대라는 지방 사립, 그것도 전임교수들이 학원 민주화 이후 학교를 운영한 독특한 경험을 겪은 곳에서 훌륭한 인격, 세계를 향한 관점과 원칙이 있는 선생님들로 부터 배울 수 있었다.(물론 내가 만난 전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선생님들 중 다수를 난 여전히 존경하고 따르고 있다.) 그런면에서 난 아카데미 정신의 마지막 수혜자일지 모른다. 난  비록 내 10대를  IMF 외환위기에 파괴당했지만 내 20대는 아카데미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선생님들과 한국적 아카데미의 마지막 구성요소인 '운동권' 끝물을 경험하며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런면에서 나에겐 포스트 아카데미가 아닌 아카데미의 복원과 계승을 이야기 할 책임이 더 클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학'은 중세 파리와 남독일, 북이탈리아에서 형성된 이후 이어져온 아카데미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일부 교수들의 범죄와 난행을 개인적 일탈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난 이것들 역시 퇴락해가는 한국의 대학 문제와 일정한 연결고리를 가지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래 내게는 승계하고 복원시켜야 할 한국의 대학은 퇴락하고 있다. 아니 장기 자살을 하고 있다.

 

 

 

 

 

제도 혹은 장치 그리고 공간으로 대학은 그것이 존재해온 시공간적 배경과 맥락, 경험과 결합되면서 고유한 의미를 지녀왔다. 이는 이와이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글항아리,2014)>와 같이 대학에 대한 발생적 분석을 시도한 책을 통해 충분히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 배경, 역사와의 관계는 한국에서도 드러난다. 근대에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한국의 대학은 단순한 교육 기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군부 권위주의 시기 한국이 경험한 압축적인 발전 국가의 경험은 한국에서 사회적 계층 유동성을 폭발적으로 증대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계서의 상부로 올라가는 가장 중요하고 유효한 수단은 대학으로의 진학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개개인과 그의 가족들은 막대한 비용의 부담을 감내하면서 까지 미래의 부와 기회를 위해 대학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그의 부모 세대 내지 조부모 세대와는 비교 불가능한 사회적 계서에 자리 잡게 된다.(이걸 단순한 공업화, 산업화만으로 설명하긴 힘들어 보인다.) 한편 대학은 군부 권위주의에 대한 하는 좋은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의 산실이었다. 4.19나 2.28같은 제 1공화국 당시의 저항에서 고등학생의 역할이 컸다면 60년대 한일협약 반대투쟁 이후 '좋은 나라 만들기 프로젝트'의 주연은 대학생으로 옮겨간다. 특히 1980년 광주의 경험 이후 급진화된 학생운동은 한국에서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퇴조와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주역이었으며, 다수의 사회운동들이 학생운동을 인적 자원으로 하여 형성, 성장하게 된다. 한편 자본에게는 대학은 상시적인 인적 자원이 존재하는 공간이었고, 한국이 점차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산업 중심이 이동하고, 나름 글로벌한 경쟁 무대로 옮겨가며 고등 인력의 수급은 더욱 중요해져간다. 그리고 국가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관료, 정치인의 충원과 더불어 민주화라는 지점에서 대학과 관계해왔다. 이러한 관계는 한국의 대학 상당수가 구한말과 해방 공간이라는 고유한 시공간 위에서 성립되었다는데에서 연유한다. 대학과 국가 사이에는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 관료 충원과 같은 세부적 관계항을 살피지 않더라도 구한말 이래 이어져온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조만간 수도권 주요 4년제 종합 대학의 발생 과정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대학 진학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고, 20대와 대학생의 구분이 사실상 소멸한 이후 대학은 퇴락해간다. 이전 시대부터 큰 힘을 가졌던 학벌과 대학 서열은 만인 대학생 시대에서 양화와 악화를 구분하는 잣대로 자리잡게 되었고, 국가, 자본,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개인의 삶으로 보더라도 이제 중요한건 대학 진학이 아니라 어느 대학으로 가서 어떤 멤버십을 가지느냐였다. 한편 대학 졸업이 사회적 계서 상승 내지 양질의 노동시장 진입이라는 방정싱이 해체된 이후 대학은 더이상 가정과 개인에게 사회적 계서 상승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했다. 한편 노동시장과 경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대학은 자기 학생을 양질의 일자리로 보내는 일에 목매게 되고, 자본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대학 스스로의 지위 향상과 노동시장 진출에서의 유리함을 도모하려 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