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당한 고통과 부정된 책임

<세월호 참사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이시훈

(본색 소사이어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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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세 계절이 흘러갔다. 세 계절이 흐르는 동안 딸 잃은 아비는 이 나라의 큰 도시,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한 여름의 땡볕 아래 앉아 50일에 이르는 목숨을 건 단식으로 딸 잃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과 설을 보냈지만 유가족은 웃을 수 없었다. 여전히 열 명의 주검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깊은 진도의 심해에 잠들어 있었다. 계절이 흐르는데도 사건의 수습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이 어처구니없고 황망한 죽음 앞에 슬퍼하면서도 진실과 책임을 묻는 고독한 싸움을 진행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집권세력과 집권여당은 이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 부정하고 있으며, 책임을 묻는 요구를 철저히 파당적, 인격적 공격으로 이해하고 있다. 참사의 수습과 후속대책에 있어 유가족들과 함께 호흡하며 때로는 조율을 때로는 대변의 역할을 해야 할 야당은 온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섣부른 타협 시도로 전도유망하던 야당의 수장은 정치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야당의 기능 상실로 집권 보수당이 논의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보수 일변도의 언론 환경에서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균열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고로 폄훼되고, 어느 종교 집단의 탐욕이 낳은 비극으로 치부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고통과 이에 대한 책임 요구는 이기심이라고 공격받았다. 근래 새롭게 대두된 한국의 넷우익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해 사회 통념과 도덕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비난과 막말을 쏟아냈으며, 자식 잃은 아비의 단식에 폭식 투쟁이라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질 정도의 모욕으로 응답했다. 결국 통과된 특별법이란 것은 사실상 탈진해버린 유가족의 의사는 충분히 토론되고 반영되지 못한 법이었다. 물론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요구에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특별법 제정의 대원칙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는 집권세력과 보수언론의 프로파간다에 묻혀버렸다. 힘겨운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와 투쟁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지 못한 특별법과 특별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조사위원회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지나며 사실상 기능 마비 상태에 놓여 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통해 그 안팎에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들이 드러나는 하나의 총체적 균열이며 성찰적 계기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바로 국가의 책임 문제다. 어떠한 경위와 배경으로 그런 문제 있는 배가 운항을 할 수 있었는지, 배가 여러 결함과 문제를 떠안고 출항하는 것을 왜 국가가 막지 못했는지부터 왜 피해자들이 구조되지 못한 채 가족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야 했는지, 사고의 구조와 수습 과정에서 보인 미심쩍은 부분들과 국가의 역할 부재 전반이 바로 국가 책임의 영역이다. 이는 지난 10년의 민주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드러난 신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무능한 정부 조직과 관료 조직의 문제이며 또한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국가의 정직성, 공적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근대 이후 국가의 역할로 자명하게 수용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국가라는 공리의 문제다. 결국 세월호 참사에는 선주와 운영사, 선원, 배의 출항과 운영 감독 책임자, 구조 책임자 등이 져야할 만큼이나 국가가 져야할 책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국가는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세월호 참사는 그 사건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현실의 단면을 통해 우리에게 강력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이어진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취약해진 국가의 역할, 공공성, 책임 전반의 문제, 타자의 고통과 호소에 대한 응답 가능성의 문제를 통해 반추할 수 있는 개인의 윤리성과 공감,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희석하고 왜곡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세월호 참사에 존재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성찰적 계기가 한국 사회에 생명력을 지니고 유의미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낙관적인 답을 하긴 힘들어 보인다. 지난 2013년 여름, 김영오씨의 긴 단식 투쟁과 이어진 원내에서의 정치적 교섭의 결과, 여러 곡절을 거쳐 통과된 세월호 특별법은 진상 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위원의 선임은 물론 정부와 여당 측 조사위원들이 보인 파행적 행동으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진상 규명에 있어 가장 핵심적 요소로 기억과 성찰, 조사 전반에 강력한 시각적, 상징적 계기가 될 수 있는 세월호 선체의 인양은 경제적 논리로 유예되고 있다.

특별법과 조사위원회의 무력화, 선체인양의 지연, 넷우익과 보수 언론의 선전으로 세월호 참사의 사회적 의미 역시 자리 잡지 못하고 퇴색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세월호 참사의 마무리는 국가의 책임 없음선언과 금전적 보상(배상이 아니다)이 될 공산이 크다. 한국 사회는 이와 같은 국가적 책임, 구조적 책임이 외면 부정되고, 개인의 소통, 공감 불가능이 드러난 가까운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 냉전의 종식 이후 열린 증언의 시대1990년대 증언의 시대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처가 바로 그것이다. 김학순 여사는 최초로 이 문제를 증언함에 있어 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 인정을 요구했고, 송신도 여사는 총리의 공식적 사죄를 요구하는 소를 제소하기도 했으나 이 증언의 시대는 일본 사회에 성찰을 기반으로 한 진보를 낳기보다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로 불리는 우익의 반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증언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 고노 담화, 호소카와 연설,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지는 발언에서 부분적 사죄와 강제성의 잠정적 인정을 했으나 이것이 국가 수준의 전면적인 책임 인정의미 하지 않았으며, 자연히 국가에 의한 배상이 아닌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통한 경제적 급부의 지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양자 사이에는 국가의 책임, 구조적 책임, 성찰의 기회의 마멸이라는 많은 유비점이 존재한다. 이에 이 글은 세월호 참사의 가장 우려되는 미래상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여성평화기금)’을 상정하고, 여성평화기금을 만든 1990년대 일본의 경과와 그 과정에 나타난 책임 희석의 논리를 살피고자 한다.

 

 

. 전후 일본의 책임과 배상 문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국가 책임 논쟁은 1991년 고 감힉순 할머님의 종군 위안부 강제동원 증언을 전후하여 표면에 떠오른 일본의 전쟁,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와 그 논의와 유사하다. 1989년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육군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침략전쟁의 역사 한 가운데 섰으며, 1945년의 무조건 항복을 외친 당사자, 일왕 히로히토(쇼와 천황)이 세상을 떠난다. 비록 동경 극동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으며 직접저인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히로히토가 침략과 식민지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를 의식한 듯, 당시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의 근화(謹話)에는 히로히토의 침략 책임을 감싸고 변명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근화에서 히로히토가 비록 선전 교서와 종전 교서의 최종 결정권자지만 그 전쟁과 침략이 히로히토의 본의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전쟁은 히로히토가 원했던 바가 아니며, 그 결정은 단지 당시의 총리대신과 각의, 정치인과 군부의 책임인 것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과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등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침략과 전쟁, 범죄의 책임소재를 당시 수상과 정치인들에게 의한 것으로 격하시키고 결과적으로 히로히토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언술일 뿐이었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 종군 위안부 문제를 위시한 과거사 책임 문제는 새 국면을 맞이한다. 시작은 앞서 이야기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다. 하지만 이 국면은 단순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증언된 이상의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우선 냉전 구도가 해체되며 냉전 구도에 억눌려 있던 일본의 침략, 식민지 책임 문제가 드러났다. 비록 일본이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이던 1972년 중일공동성명을 통해 국교 수립과 동시에 중국 측의 전쟁 배상권 포기를 이끌어 냈으며, 한국과도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청구권 문제를 매듭지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 외의 국가와도 정부 간 청구권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며, 과거사 문제가 하나의 대중적 열의가 투영되는 이슈로 자리 잡는 것을 이런 외교적 방법이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전후해 한일 간에 위안부 이슈가 대두된 시점에서 일제 종군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이며 일본에 거주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 총리의 의회를 통한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을 동경지법에 제소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도 많은 사회단체들이 송신도 할머니에 적극 연대하며 여론을 형성했다.

19937월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단독 과반수가 무너지며 1955년 체제의 균열이 나타난다. 호소카와를 중심으로 한 비 자민당, 비 공산당 연립정권이 들어섰고, 연정 수립 직전이던 19938월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장관이던 고노 요헤이가 위안소의 운영, 위안부의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과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이전의 일본 정부의 입장에 비해 분명 진전된 입장이었으며 사과와 책임 인정의 단초를 제공하는 유의미한 담화였지만 담화 자체가 침략, 전쟁범죄에 관한 책임표명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고노담화 직후 들어선 호소카와 내각 등 비() 자민당 정권에서도 책임 문제에 관한 더 이상의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호소카와 내각에 이어 사회당과 자민당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한다. 사회당 출신인 무라야마 총리는 집권 기간 동안 두 개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하나는 1995년 태평양전쟁과 이전 시기 일본이 행한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를 표한 무라야마 담화이며 다른 하나는 담화 이전 1994년 국민성금을 통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골자로 하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여성평화기금)’의 설립이다.

무라야마 내각 시기 일본의 과거사 인식은 이전보다 진전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무라야마 담화 역시 여전히 천황의 전쟁, 침략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태평양 전쟁 등 일본의 침략 자체가 불가피 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사죄에 이은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정리된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담화 이전에 설립된 여성평화기금 역시 이런 흐름과 궤를 함께 한다. 여성평화기금의 구성에서 정부의 역할은 운영재정의 부담에 그친다. 기금의 조성은 일본의 보통 국민들의 모금으로 이뤄졌으며, 무라야마 내각을 이은 하시모토 자민당 내각에서 기금의 부족분을 정부 재정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구체적인 배상에서 국가는 책임과 역할을 회피했다. 결국 기금의 조성과 운영, 기금을 통한 배상(기금의 지원을 배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과정 일체에서 책임의 주체인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과거의 잘못과 고통 받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선량한 보통 일본 국민의 마음과 역할만 드러날 뿐 이다.

배상은 어떤 잘못된 행위에 의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책임이다. 하지만 책임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배상은 그야 말로 말장난 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서독은 나치 독일을 직접적으로 계승하는 국가가 아니다. 양자 사이엔 하나의 강렬한 단절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이란 국가에서 전전(戰前)과 전후(戰後) 체제 사이에 과연 그런 단절성이 존재하는가? 일본은 패전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이 현재의 상징천황제다. 천황이 비록 과거와 같이 정치적 실권(비록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지라도)을 지닌 존재는 아니지만 여전히 일본이란 국가를 그 인신을 통해 표상하고 있다. 헌법이 비록 변경되었지만 천황제의 형태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전전과 전후 모두 동일하다. 태평양전쟁의 선전 교서와 종전 교서의 최종권자는 전쟁 후에도 상징천황제의 형태로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전쟁을 주도한 이들 상당수가 동경의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통해 처벌되었지만 적잖은 정치엘리트들은 전후의 일본을 구성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현재의 일본이란 국가는 과거 서독 보다 과거사에 대해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책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일본 국가는 단 한 번도 자국의 책임을 명백히 인정하고 사죄를 표하지 않았다. 단지 계속해서 일본과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된 침략과 범죄, 전쟁을 몇몇 문제적 개인들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있고, 천황과 일본 국가는 이에 대해 그저 도의적 책임만을 이야기한다.

이런 일본의 전후 책임 문제에서 우린 몇 가지 중요한 책임 희석의 논리를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피해자의 고통을 철저히 돈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제주의적 접근으로 여성평화기금이 그 전형이다. 일본은 인도차이나 국가들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피침략 국가들 그리고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과거의 책임을 철저히 돈으로 해결해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책임 있는 사죄의 표현은 잘 이뤄지지 않아왔다. 그런 접근은 시간이 흘러 위안부 문제가 대두된 시점에서 이어진다. 여성평화기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위로금을 중요한 보상수단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통은 앞에서 말했듯이 오로지 돈의 문제로 환원된다. 특히 여성평화기금을 통한 보상은 그 과정에서 가해자의 책임은 드러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그저 선량한 일본 국민 개인들의 선의에 따른 보상만이 드러난다.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와 사과, 고통에 대한 응답, 역사에 대한 평가와 재발방지의 노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접근은 책임 부정의 논리다. 현 아베 내각에서 총무상을 맡고 있는 다카이치 사나에는 과거 일본 국회에서 자신의 세대는 전쟁 당사자 세대가 아니기에 반성을 하려 해도 할 수 없으며 반성하지도 않겠다고 발언한다. 즉 과거의 잘못을 현재의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이다. 일견 다카이치 사나에의 이 발언은 일리 있어 보인다. 실제 일본은 195,60년대 여러 피침략 국가에 여러 명목으로 전쟁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를 통해 형식적으로는 일본이 과거의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고, 결정적으로 현재 세대는 그 침략 세대가 아니기에 자신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길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 그 논지이다. 그리고 이런 책임부정의 논리의 다른 한 축은 위안부의 동원에서 일본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 후자의 논리에서 강제동원은 그저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갔던 이들이 주장하는 거짓일 뿐이다.

세 번째 접근은 다소 유치하고 졸렬하다. 그것은 위안부의 강제 동원 문제를 희석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발적 참여, 매춘, 어느 정도 눈치 채고도 따라간 사람의 존재, 즉 자발성의 문제를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즉 위안부 전체를 강제로 동원, 수탈된 순수한 여성과 어느정도의 자발성을 지닌 불순한 여성, 혹은 순수한 처녀와 그렇지 않은 이로 분할하는 시도가 이 논리의 핵심이다. 이는 아주 악질적인 논리다. 이 논리는 피해자 집단을 온전히 하나의 총체적 폭력과 성범죄를 경험한 피해자 집단으로 사유하지 못한다. 물론 위안부의 이미지들 특히 정대협이나 소녀상이 표상하는 이미지만으로 사유하는 것은 온전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분리된 접근은 사안의 본질, 즉 구조적이고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동원과 여성 수탈, 국가에 의한 성범죄라는 본질을 은폐하고 개인이 그 사실을 인지했느냐, 어느 정도의 자발성 있었느냐와 같은 문제로 전화해버린다. 그 결과 자발성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마치 보호될 필요가 없는 이들로 전락되고, 본질은 은폐되고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가 부각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피해자들을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과 증언을 그저 부끄러운 일을 들춰내는 것으로 여기는 의식 역시 이런식의 순수성 논쟁과 맞닿아 있다.

 

 

. 위안부 책임 희석의 논리와 세월호 책임 희석의 논리 사이의 유사성

 

세월호를 둘러싼 책임 문제는 여성평화기금에 이르는 90년대 일분 정부의 책임 회피 논리와 많이 닮아 있다. 여기에서도 철저히 경제주의적 시각과 책임 회피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사실 그것의 질적인 측면에선 훨씬 저열하기 그지없다.

우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경제주의적 접근은 크게 두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유가족과 피해자에 대한 접근이며 하나는 여론 형성의 차원이다. 전자의 경우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사건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지닌다. 사건의 해법과 책임의 이행은 단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다. 언론과 일부 네티즌들이 유포하는 보험금 문제, 보상금 문제를 이런 논리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식의 인식에서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하고 있는 책임과 진실규명의 요구는 그저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이기적인 활동으로 전락한다. 이는 앞서 위안부 문제에서 여성평화기금의 보상방식, 그리고 송신도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의 사과 요구에 대한 조소에 담겨 있는 정서와 일맥상통하다. 그리고 하나 여론 형성의 차원에서 경제주의적 접근 역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 이후 5월 초순부터 보수적인 언론을 중심으로 세월호 참사의 경제적 후파, 내수시장과 소비심리의 위축 이야기에 모락모락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여론 형성 과정에서 보수 언론이 가진 강한 헤게모니는 머지않아 바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점점 세월호 참사를 유벙언과 구원파의 문제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 그리고 외부세력의 행동에 지나치다는 의견들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경제주의적 접근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활동을 철저히 공격하고 평가 절하하였고, 그들의 도덕적 기반마저 침식시켰다.

또 하나, 책임 회피의 논리 역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다. 책임 회피의 논리는 크게 국가 책임 인정 여부에 따라 나뉜다.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책임 회피의 논리는 현 정권에 대한 책임 추궁 불가를 주장한다. 즉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이명박 정권을 위시한 지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달려왔던 과거 정권에 있다는 주장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지 만 1년이 갓 지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의 구조적 책임을 현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 이 첫 번째 책임회피 논리의 요지이다. 이는 마치 위에서 언급한 현 아베 신조 내각의 총무상 다카이치 사나에의 발언과 유사하다. 즉 과거 정권(과거 세대)의 오류와 실책을 왜 현재 정권(현재 세대)에게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고는 국가를 매우 파당적이고, 인격화해서 이해하는 논리적 전제의 오류를 갖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비단 민형사적 책임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국가의 책임과 정권의 책임을 등치시키는 오류 역시 존재한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박근혜 정부에 요구하는 책임은 박근혜 개인과 김기춘 개인에 대한 책임 요구가 아니다. 그들이 국가라는 기구, 체제에서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요구를 박근혜, 김기춘 개인에 대한 책임 요구로 오독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구조적 문제가 존재하는 사건의 책임이 갓 들어선 현 정권이 아니라 이전 정권에 있다는 식의 사고가 가능한 것이다. 이미 이야기 했듯이 이 구조적 책임은 단순 한 인격이나 파당에 대한 책임과 다르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져야하는 책임은 이 구조적 책임이다. 이것은 과거 정권이 국가라는 구조 속에서 수행한 규제개혁정책 대한 책임이며, 그리고 현 정권이 바로 그 정권의 체제를 계승하는 정권이기에 더욱 분명히 져야 하는 책임이다.

과거 히틀러 나치스 정권의 홀로코스트와 폴란드 침략과 이후 서독 사민당 정부의 사과는 이런 면에서 아주 중요한 사례를 제시한다.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이후 독일은 4대 연합군에 의해 분할, 직접 통치를 겪게 된다. 그렇기에 서독은 나치당의 독일제국과 국가 체제로서 구분되는 점이 있다. 그럴히게 서독 그것도 과거 나치에 저항했던 사회민주당 내각이 사과와 책임을 표하는 과정을 우리는 구조적 책임의 실천 과정이란 맥락으로 이해하고 주목해야 한다. 빌리 브란트의 사과가 가능했던 것은 이전 시대의 국가, 구조적. 책임의 문제를 한 개인의 인격, 파당에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비록 서독이 나치독일을 명시적으로 승계하지 않더라도 서독이란 국가와 나치독일은 독일사의 흐름과 맥락,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의 경험에서 하나의 선상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이전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진 침략과 범죄에 대해서 책임과 사죄가 국가 체제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이행할 의무가 서독에 있는 것이다. 결국 빌리 브란트 정권이 폴란드에 참배하고 사과 한 것은 서독 국민들이 그리고 서독이란 국가가 발 딛고 있는 역사적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 세월호 참사에서 박근혜 정권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순수한 피해자라는 허상 역시 세월호에서 비록 크게 드러나진 않더라도 곳곳에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를 문제 있는 배를 저렴한 배삭으로 이용하려던 이들이 당한 사고로 이해는 이들이 세간에 존재한다. 이는 마치 위안부 문제를 자발성과 기만성의 잣대로 분할하려는 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사실 이는 어떤 반박을 할만 한 가치도 없는 문제제기다. 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시장에서 개인이 비슷한 효율에서 더 저렴한 가격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향유하려는 것을 하나의 선으로 취급하지 않았나? 세월호 희생자들이 배의 문제를 인지하고도 자발적으로 탔건, 모르고 속아서 탔건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애시당초 그런 배가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관리 체계와 운영의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점이다.

세월호 참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 모두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문제는 바로 자명한 책임의 문제에 대해 이를 부정하고 폄하하고 희석하려는 조직적, 지적, 정치적 시도가 이어지고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양국의 정치 구조, 권력 구조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즉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문제는 양국의 정치와 사회에 내재된 어떤 모순이 드러난 계기이며, 그것의 변화를 촉발 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의 배상 방안으로 일본 측이 추진한 여성평화기금 역시 세월호 참사의 수습 방안의 한 모델로 집권세력에 의해 제시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특별법이 통과된 상황에서 배상을 논의하는 것은 다소 시기상조로 여겨질 수 있다. 현재에 더 중요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 전반이다. 하지만 선체의 인양이 요구되고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조사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른바 완전한 진상규명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결국 국가는 스스로의 책임을 온전히 지려 하지 않을 공산이 크고, 현실적인 배상을 위해 여성평화기금과 같이 관영 기금도 민영 기금도 아닌 모호한 형태의 배상 기금을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국가가 세월호 참사에 직접적 책임이 없지만 국가가 국민이 겪은 부당한 희생과 피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질 것이며, 다수의 선량한 국민의 협력과 모금이 이런 국가의 선의와 함께하는 여성평화기금식의 배상 모델이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지점이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문제 사이의 유사성 내에 존재한다.

 

 

. 나오며

 

그동안 이 글은 위안부 책임 문제의 도래와 여성평화기금의 형성 과정을 살피며 이 과정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 문제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두 역사적 사건 모두 책임의 문제에 있어 많은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새월호 참사에는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재난과 사고가 국가 책임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존재하며, 이는 이전의 사건과 세월호가 구분되는 가장 분명한 특징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세월호 참사의 수습 과정의 종착역으로 아시아여성평화기금과 같은 형태의 무책임의 배상 체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비록 일본의 여성평화기금이 와다 하루키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과 활동가들에 의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10년 가까이 지속되며 나름 개인과 집단의 대표로 어느 정도의 책임을 다 하려 노력한 것에 비해 세월호 참사에서 나타날 것으로 우려하는 국민모금 모델은 그정도의 양심과 책임마저 부재할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의 경우 위안부 문제가 이른바 국체의 책임 문제로 이어진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수준과 맞닿아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 세월호 참사의 경우 세속화된 권력의 정당성, 안정성 문제와 맞닿아 있기에 국민모금식의 배상 체계가 들어선다면 그 과정은 여성평화기금 보다 훨씬 부도덕할 공산이 크다.

다른 한편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1990년대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열린 증언의 시대와 거기서 나온 증언들이 동아시아 전체에서 하나의 역사적, 정치적 합의와 공통의 기억, 지역적 이니셔티브로 나아가지 못한채 개별적인 증언으로 노화되고 마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 90년대 중반 전후 50주년을 전후해 이른바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일련의 보수 우익의 운동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새역모에 의해 추진된 역사 교과서 집필이었다. 이후 일본 사회에서 과거 전쟁과 침략, 가해의 기억과 책임이 착근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경제적 위상의 불안정화, 중국의 부상, 민족주의적 적대의 심화와 맞물리며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이른바 보통국가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에 의해 증언된 고통의 기억이 사회적으로 착근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을 이러한 일본의 경우와 함께 5.18과 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기억투쟁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 하나의 성찰적 계기로 남아야 할 세월호 참사가 진상 규명과 책임 규명에 실패하고 책임에 수반되는 배상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할 경우 생떼 같은 목숨들이 남긴 그 무언의 증언 역시 뿌리 내리지 못할 것이다. 국가의 무책임과 자본의 탐욕, 관료의 무능과 부도덕한 언론이 낳은 세월호 참사는 과연 어떻게 수습 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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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공포의 시대를 건너기 위하여(대구신문 16.6.21)


이시훈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본색 소사이어티 대표)


조 콕스에 대한 추모 행렬(원출처 AFP/ 한겨레에서 인용)


  전 지구가 혐오와 공포, 분노와 배제가 만들어내는 어둠에 잠식당하고 있다. 경제적 불황의 구조화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분배 구조, 고착화된 실업은 분노와 좌절이 자라날 씨앗을 배태하였다.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이뤄진 금융화와 시장화, 유연화는 우리 삶을 부채에 옥죄인 불안정한 삶으로 몰아넣었다. 인류가 1789년 이래 200년 이상에 걸쳐 축적하고 쟁취해온 민주주의, 타자에 대한 존중과 관용, 다원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한 해체 등은 이런 위기 속에서 급격하게 자라나는 혐오와 분노, 좌절과 공포의 정념 앞에 그 위협 받고 있다.

  며칠 전, 브렉시트(Brexit) 문제로 격한 정치적 투쟁이 펼쳐지는 영국에서 노동당 하원의원인 41세의 조 콕스가 지역구 주민 간담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피습 당하여 살해당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인권, 구호 운동가였던 그녀는 EU 잔류를 호소하였고, 그녀를 습격, 살해한 범인은 영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극우파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적 실험인 유럽연합은 경제적 침체와 급증하는 난민의 압력 속에서 극우파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서쪽으로 지브롤터에서 동쪽으로 레스보스와 키오스섬에 이르는 광대한 지중해를 건너오는 난민의 행렬에 유럽은 통합 실험은 물론 가장 선진적인 유럽의 민주주의와 관용, 사회적 다양성과 다원주의 역시 시험대에 올라서 있다. 

  이런 현상은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저급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유력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 되었고, 티파티와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설파하고 있다. 영국에선 극우파인 영국독립당(UKIP)가 득세하고 있고 지난 프랑스의 광역지역 선거의 1차 투표에서는 극우파 국민전선(FN)이 압승을 거둬 프랑스의 기성 양당을 충격에 빠트렸다. 최근의 오스트리아 대선에서도 극우파 자유당이 1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스의 극우 황금새벽당은 나치즘을 사실상 표방하며 준군사조직을 조직, 테러와 암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우리의 현실 역시 멀지 않다. 이미 일상 공간에서도 여성, 소수자 등 타자와 유색인종에 대한 적대와 혐오, 불신과 공포가 확산되고 내면화되고 있다. 지난 517일 새벽 강남역 공중화장실에서 여성혐오-묻지마 범죄에 희생당한 여성은 범인과의 연고나 일면식도 없이 단지 그 시간, 그곳에 나타난 여성이란 이유로 차디찬 화장실에 쓰러져 꿈과 표정을 빼앗겨야 했다. 범인은 단지 여성에게 무시당한 경험을 이유로 그녀를 죽였다고 이야기 했다. 비록 한국의 경찰은 그의 정신병리학적 문제를 원인으로 설명하였지만 한국의 맥락에서 이런 범행을 개인의 정신병리적 문제로 치부하긴 힘들어 보인다. 이미 세월호 참사 이후 넷우익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혐오와 배제, 공포의 정념은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피로와 좌절과 결합되어 확산되고 있고, 특히 한국의 반공주의적, 인종주의적 배경과 맞물려 더 강한 에너지를 내고 있다. 심지어 보수정권은 이러한 혐오와 공포, 배제의 열정을 정치적으로 조장하고 동원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트럼프나 극우파의 대두는 마냥 먼 남의 나라 이야기라 외면하긴 힘들어 보인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과연 이런 새로운 반동의 역사에 유의미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답은 무척 회의적으로 보인다. 그간 사회의 일부 마이너한 집단의 의식이나 정서라 저평가된 혐오와 공포, 증오와 배제는 경제적 불황과 일상의 불안정화, 이민과 난민의 유입 속에서 확산되고 내면화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이에 대처할 역량은 점점 취약해져간다. 민주주의는 일부 선거 전문가들과 여론조사 전문가, 직업 정치인들의 것으로 전유되고, 대중은 정치와 공적 문제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관용은 어느새 타자에 대한 무시나 무관심과 등치되어 읽히며, 다원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항구적 승리를 선언했던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는 전환과 위기의 종착지를 향해가고 있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타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와 개방, 고통 받는 이에 대한 응답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혐오와 공포에 맞서는 환대와 연대, 신뢰를 바탕으로 생활공간을 조직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경제적 호황과 부의 증진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주의는 경제적 불황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전 지구적으로 과거와 같은 경제적 성장과 호황의 전망이 어두운 시점에 서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맞는 정치를 형성하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조직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혐오와 공포, 분노와 배제 그리고 그 태반으로 불안정과 불균형에 맞서는 길일 것이다. 정치가 새롭게 정의되어야만 우리의 삶은 변화할 수 있다.

 


1. 전 세계의 기성 정치는 장기 빈곤과 긴축의 시대에 양극으로 부터 도전 받고 있다. 트럼프, FN, 시리자, 포데모스 어제 이탈리아 지방 선거의 오성운동까지 기존 20세기의 정치적 유산들에 대한 강력한 의문과 공격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일찍히 우리가 경험한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이종있다고 본다.

2.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단순히 권력구조와 정치구조를 규정하는 협애한 의미가 아니라 믿는다. 우리 삶의 태도와 정서, 의식과 규범, 관념, 관계에 광범하게 작동하고 구성하며 조직하는 체계이고 원리다. 하지만 역시 이전 시기의 이 유산 역시 위협받는다. 걸거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많은 요인들에 맞서도록 유효하게 재규정하고 재조직할수 있는 틀도 제공한다면 그건 마냥 과거의 유물로 기각되어선 안되리라 믿는다

3.불황과 실업, 빈곤과 분노의 시대에 우리는 뭘 어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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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과 구의역, 그리고 (영대신문 1626호 16. 6. 7 발행)

 



대구 중앙로역 2번 출구




  불과 2주 사이를 두고 서울 2호선의 두 역이 거대한 추모와 공론의 장이 되었다. 지난 517일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혐오범죄에 이제 23살 여성이 피살된 데 이어 이번에는 이제 20살을 갓 지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지하철 스크린 도어 보수 과정에서 지하철과 스크린 도어 사이에서 목숨을 잃었다. 잠실 철교를 가운데 두고 몇 정거장 되지 않는 역 사이는 애도와 공감,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로 가득찼고, 두 역사는 어느새 추모와 애도의 언명이 적힌 포스트잇과 조화들에게 그 여백을 내어 주었다.


  강남역과 구의역 두 사건은 일견 전혀 다른 개별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나는 여성에 대한 혐오에 의한 살인 사건이며, 하나는 지하철 안전시설 보수과정에 생긴 산업재해이니 그것이 서울 2호선 선상에 일어난 사건이란 것을 제외하곤 유사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많은 유사점과 공유 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접점의 복판에 우리가 인지하지 않은 구조와 권력의 문제, 위험과 불안, 폭력의 문제가 놓여있다. 강남역과 구의역의 두 사건은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통해 우리의 시선 바깥에 있던 이 현실을 우리의 인지 체계 내에 기입되게 한 사건이기도 하다.


  지난 517일에 있었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은 여성 혐오라는 층위와 직간접적으로 상관없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폭력이라는 층위가 결합되어 나타난 비극이었다. 우리는 이를 여성혐오라는 새로운 범주의 수용을 통해 설명하고 그 내의 구조적이고 권력적 속성을 포착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접근의 역사에 비해 여성이라는 약자에 대한 폭력의 역사는 비근한 역사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도구화를 포함하는 이 폭력의 역사가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하기에 여성들은 강남역에서 있었던 사건을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처럼 느끼게 되었고, 그녀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성적 폭력과 대상화의 경험은 서로간의 공감과 연대의 공간을 여는 매개가 되었다. ‘자신이 될 수 있었다는 구호는 바로 타인과 나의 개별적일 경험을 보편화하고 있다. 구호가 보여주는 그 지점이 있었기에 단지 흔한 사회면 단신 기사로 사라질 법 했던 사건은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연대와 추모의 행렬로 이어졌다.


  구의역 사건은 어떠하였는가? 그것은 효율과 비용 절감 논리 속에서 이뤄진 하청과 외주가 낳은 비극이었다. 한국은 공공부문부터 민간부문에 걸쳐 광범위한 부문에서 거칠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에 대한 외주화와 하청화가 만연해있다. 사실 하나의 산재로 구의역 사건 같은 일은 너무나도 비일비재하다. 울산이나 거제와 같은 곳에서 노동과정에서 낙사나 압사는 일상적인 죽음이며 대구나 창원 같은 부품공업이 활발한 곳에서 선반이나 금형 작업 과정 중에 절단된 손가락이 과연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라. 단지 이 죽음과 신체 절단의 구조가 우리의 정제된 삶바깥에 있었기에 쉽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구의역 사건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그 죽음 자체가 가진 비극성 보다는 죽은 노동자의 갓 스무 살이 되었다는 나이와 가방 속의 컵라면이라는 서사의 힘이 컸다. 이미 서울 곳곳에서 유사한 비극이 있었지만 그것은 한 줄 보도로 휘발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컵라면과 나이의 서사는 많은 이들이 구의역 사건에 심적으로 개입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비록 컵라면과 스무 살의 서사가 위험과 불안의 외주화, 하청화라는 구의역 사건의 본질을 압도하였지만 이 서사라도 있었기에 사람들은 생활공간 이면에서 일어나는 이 죽음과 절단의 구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죽었다. 살아 있는 얼굴과 꿈을 지닌 인간이 죽었다. 누군가에겐 여성으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로 대상화 되고 타자화 되었지만 우리와 다르지 않은 뼈와 살에 온기가 있는 인간이 죽었다. 서로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죽은 두 사람의 죽음이 나와 상관없는 남의 죽음이라면 그것은 단지 짧은 비애감, 연민과 함께 마멸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나와 다르지 않은 이의 죽음이라면 그것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의 고통이, 누군가의 경험이 나에게 들어온 순간 애도와 추모, 절규와 비극은 연대와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그것이 바로 영문도 모른 채 화장실에 쓰러져 죽어간, 지하철과 스크린도어 사이에서 죽어간 이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윤리이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에 응답하고 그것이 마치 나의 경험인 듯이 반추하고 상상하는 과정은 우리를 정치화 시킨다.


  여성이기에, 비정규 하청 노동자이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소수자이기에, 약자이기에 겪어야 하는 불안과 공포, 죽음의 사슬을 끊어내어야 한다. 정치는 누군가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 고통과 기억에 대해 연대하고 공감하고 함께 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추모와 애도를 넘어서는 약자에게 불안과 공포를 전가하는 구조를 넘어서는 응답과 연대의 정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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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2015. 리들리 스콧 감독, 맷 데이먼 주연.






1. 마션은 끊임없이 알폰소 쿠아론의 '그레비티'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와 비교된다. 그것은 마치 화성에 남겨진 와트니의 입장이 지구 궤도에 혼자 남은 스톤(산드라 블록)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 일것이고, 인터스텔라의 만 박사(와트니와 같이 맷 데이먼이 분한)의 처지가 와트니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우주라는 하나의 공통된 배경, 환경적 조건에서만 두 영화와 공통점을 가질 뿐이며, 영화 그 자체는 오히려 '캐스트 어웨이'와 더 비슷한 점이 많다.


2. 영화는 기본적으로 재난물이다. 그것도 무려 우주 재난물. 하지만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전형적인 재난물의 정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요컨데 포세이돈 어드벤쳐나 타워링 같은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을 위기에 빠드린 재난은 거의 극복이 가능한지 의문스럽고 희생을 요구하는 절대적 존재다. 퍼펙트 스톰이나 트위스터의 바람과 폭풍은 공포에 가까우며, 근래에 본 에베레스트의 높이와 혹한, 험한 지형은 그야말로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다. 동시에 대개 재난물은 재난 앞에 인간이 순응하거나 인간이 재난을 정복하는 서사를 취한다. 당장 영화 그레비티에서 스톤 박사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마션은 조금 다르다. 재난의 상황 그것도 초유의 화성에 고립된 상황이지만 그런 비장감, 공포, 위압감은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인 와트니가 재난을 대하는 자세도 대개 재난물의 그것처럼 재난에 순응하거나 재난을 정복하는 그것과는 달라 보인다. 이 절망의 틈바구니속에서 제법 여유롭게 즐겁게 살아가는 인간. 마션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런 독특한 재난 앞의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건 바로 우주재난물이란 컨셉과 어울리지 않을것만 같은 음악 선곡에서도 드러난다. 우주재난 영화에서 디스코의 연속이라니....그런데 그게 위화감이 안든다.


3. 한편 가장 주목한 것은 이 영화가 '공리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며, 고난 받는 인간을 위한 연대와 인간애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NASA는 막대한 자본과 자원이 투여되는 와트니 구조를 위해 큰 출혈을 감내한다. 그를 위한 생필품 지원 로켓을 급조하지만 공중에서 분해되기도 하고, 미래를 위해 배치한 장비를 포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대개 젖기 쉬운 이 공리주의의 유혹을 영화 속의 NASA의 인물들은 나름 슬기롭게 의지적으로 물리치고 있는것 같아 보인다. 한편으로 와트니를 구하기 위하여 우주 개발 경쟁을 하는 미국과 중국은 손을 잡는다. 지구 궤도에서 중력을 이용하여 화성으로 복귀하려는 우주선을 향해 와트니를 위한 자원을 보내는 과정은 미중의 연합이었고 그것은 고통 받는 인간을 위한 도덕과 책임, 연대였다.(물론 그 안에 고도의 정치적 계산과 판단들이 존재할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연대와 반공리주의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상당히 새로운 분석을 도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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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희망을 위하여(영대신문 1608호 2014년 12월 1일 발행)

 

 

  1997년의 IMF 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사건이 정치경제사회문화노동 전반에 충격을 주었듯이 대학사회 역시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이미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있었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김영삼 정부의 충돌로 대학사회는 큰 상처를 입었던 터였고경제위기로 인해 당장의 생계는 물론 일자리 문제가 들이닥치자 대학사회는 끝없는 붕괴를 맞이한다과거 전대협한총련한 대련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의미의 학생운동은 더 이상 대학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채 소멸지만 학생운동의 빈자리를 메울 어떤 대학생과 청년들의 결집된 활동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개인의 경제적 조건이 위협받고신자유주의가 고도화 되며 학생운동마저 소멸한 대학에서 이전시기와 같은 집단적 열정을 찾기란 불가능했다오히려 이 공간은 각자도생과 서로에 대한 불신과 경쟁의식그리고 그것들이 만든 고요함만이 가득하다.


  대학사회의 쇠락이 낳은 효과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나타난다특히 대학생들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란 측면에서1997년을 전후한 몇 년 사이에 과거의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했다물론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의 당선에 청년층의 강한 지지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 청년들의 정체성은 대학생이 아니라 청년 네티즌의 정체성에 더 가까웠다그 결과 청년대학생이 처한 현실 개선의 요구가 제도 정치의 공간에서 소외되고 투영되지 않게 되었다예컨대 2001년 본교 문과대 등록금은 180만원을 다소 상회했다그러나 이것이 100만원이 오르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살인적인 등록금 문제를 국가와 정치권이 먼저 인지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던가아니다가파르던 등록금 인상곡선이 둔화된 가장 큰 이유는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본격화된 대학생들의 조직화된 등록금 인상 반대 운동이었다.


  현재의 20대들은 노인세대와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삶의 조건을 지닌 세대다그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높은 교육비용을 감수했고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그들이 안정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출한다는 보장은 없다절대 다수의 경우 더 안정적인 일자리,요컨대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을 위해 과거 입시 준비보다 더 가혹한 경쟁과 출혈을 감내해야한다설사 그렇게 노동시장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직장의 지속성과 노동강도는 여전히 그들에게 안온한 삶을 멀게만 느끼게 하고 있으며기형적인 부동산 시장은 그들에게 따뜻한 집 한 채 마련의 꿈을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런 20대학생청년들의 일반적 문제를 그동안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여겨왔다일반적으로 함께 공유하는 문제를 공통의 문제로 풀어갈 수 있는 대학사회의 부재가 절실한 지점이다물론 대학사회의 쇠락을 문제의 개인화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사실 문제의 개인화에는 자기계발서와 기성언론이 유포한 허위적인 이데올로기와 기성세대가 지닌 낡은 사고의 책임이 크다하지만 만약 대학사회가 조금 더 온존했다면 문제의 개인화라는 경향을 넘어 문제가 지닌 구조적 성격공통적 성격을 더 충분히 규명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목소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만약 문제가 공통적이고 구조적이라면 그 문제의 해결은 당사자들이 집단적으로 뭉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우린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연대는 약자들이 강자에게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하는 가장 강한 무기이다그리고 좋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이기도 하다하지만 대학사회의 현실에서 유감스럽게 이 자명한 명제는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그럼에도 우린 이 연대의 가능성,사회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다우리가 공통적으로 처해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 그것이 온전히 나만의 문제나만의 고통이 아님을나와 다르지 않은 내 옆 사람들 역시 같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함을 깨닫고 연대할때만이 대학사회의 복원이 가능하며대학사회가 내적으로 공론의 장으로외적으론 강한 정치력이 발산되는 공간으로 작동 할 수 있다만약 연대와 대학사회의 복원이 이뤄지지 않은 채 문제의 개인화가 지속적으로 견지되고 그 개인들 사이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답 없는 치킨게임이 이어질 때 한국사회 미래 세대에게 희망이란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2014년 2학기 총 6차례의 칼럼 기고를 이번 원고를 통해 마무리한다그간 6번의 기고 중 대학의 이념대학의 문화대학 언론에 이어 대학 사회까지 가장 많은 지면을 대학의 문제에 할애했다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대학은 더 이상 좋은 국가’,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기능을 잃고 기업의 인적 육성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학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계층 상승의 수단으로 욕망되고 있기도 하다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의 대학은 이 사회가 처한 여러 모순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장일지 모른다그렇지만 아직 대학이 지닌 본래적 의미본래의 역할이 유효성을 지닌다면 좋은 대학을 모색하는 일은 비단 고답적이고 낡은 일은 아닐 것이다. ‘좋은 대학을 고민하는 이들의 응답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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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와 노란봉투 사이

 

이시훈




 

 

늦은 밤 집에 돌아 와보니

야윈 아내 거치른 손으로

편지가 왔노라고 내미는 노란봉투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지

등줄기에선 식은 땀이 흘러

조심히 뜯어 본 노란봉투

 

<귀하는 해고되었음을 통보합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창백한 형광등 불빛

눈물이 흘러 가슴에 흘러

주먹이 불끈 떨리네

세상아 이 썩어빠진 세상아

맘 놓고 일할 권리마저 없는

세상아 이 미쳐버린 세상아

뒤집어 엎을 세상아

병들어 누워계신 어머니

무슨 일이냐 물어 오시네

한구석 겁에 질린 딸아이

얼굴이 샛노래 지네

 

백자 곡, <노란봉투>

 

 

  근래 SNS에선 4만 7천원이라는 제법 구체적인 돈 단위를 자주 볼 수 있다. 4만 7천원, 셔츠나 청바지를 괜찮은 옷 가게에서 한두 장 사서 입거나, 근사한 식당에서 좋은 밥 한 끼 하고도 남을 것 같은 이 금액의 뒤엔 항상 노란봉투라는 이름이 따라다닌다. 노란봉투, 그것은 바로 쌍용자동차의 매각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사측과 경찰이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가한 손해배상 가압류 47억원과 그에 관한 시사IN 기사에서 시작한 모금운동을 의미한다.

  1970년대 미국 주도의 세게 경제 체제가 재편되었다. 이른바 브래튼우즈 체제로 불리던 전후의 세계경제 질서는 1971년 이후 급격한 해체와 재편을 맞이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대두였다. 한국전쟁 이후 지루하게 이어진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국가 주도의 발전국가의 길을 걸으며 제법 온전한 경제발전을 경험한 한국이었지만, 세계화라는 수사로 포장된 이 새로운 변화 앞에선 한국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1990년대에 들어 급격히 들어온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1997년 겨울 이른바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충격파를 통해 극적으로 그 면모를 드러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한국 경제 체제의 본질은 바로 노동시장 유연화와 시장중심의 경제 구조, 금융자본의 자립화, 공공부문의 축소에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오랜 경제 성장 과정에서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위기와 충격 앞에서 다시 희생을 강요받았다. 전통적인 의미의 평생직장은 사라졌으며, 거리엔 실업자와 구직자, 파산자들이 가득했다.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라는 이전 시기 낯선 단어들이 언론의 주요한 면에 가득했다. 민중가요 부르는 백자의 노래 <노란봉투>에서 보이는 해고를 통지받은 노동자의 찰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의 일상 곳곳을 스쳐갔다.

  이런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문제가 바로 연대의 상실이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 바닥이 보이지 않는 추락이 항상 예비 된 시대를 사는 이들이 겪은 생존의 위기, 실존의 위기 앞에서 우린 점점 연대성을 상실해갔다. 삶의 방법은 연대와 협력에서 각자도생으로, 경쟁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너의 고통은 더 이상 연대하고 함께 나눠져야 할 고통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우린 그렇게 서로의 고통에 무뎌져 갔다. 그 연대성과 상실과 고통에 대한 무뎌짐이 무서웠던 것은 어느 개인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에 가득 찬 공기마냥 우리 사회, 우리 일상에 그것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는 본질적으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너와 나라는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부단한 인정과 이해, 투쟁, 고민과 독해를 요구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 하지만 한국의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그 타자성과 연대성을 위한 고려를 지극히 귀찮고 번거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우린 그렇게 너의 고통을 외면하는 법에 익숙해졌고, 그것의 편안함에 눈 뜨게 되었다. 철거와 폭력에 맞서 권리금이라도 지키려다 뜨거운 화마에 휩싸인 용산의 평범한 작은 식당의 사장님도, 최루액을 맞아가며 일할 권리를 위해 싸우던 노동자들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긴 어느 이름모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삶의 터전을 위해 싸운 강정과 밀양, 청도의 할매들에게도 우린 그렇게 무뎌져갔다.

 

그리고 우리가 외면하던 그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고를, 강제철거를, 파산을, 가압류를 알리는 노란봉투를 맞이했던가...

 

노란봉투와 4만 7천원, 학생들에겐 큰 부담이 될지 모르지만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라면, 소상공인이라면 술값 한번 아낀 돈일 것이다. 그리고 그 4만 7천원들이, 그리고 학생들의 4,700원들이 모여 쌍용차 손해가압류와 싸우고 있다. 이것은 우리 생각하는 그간의 운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다. 그간 우리에게 운동은 적대가 존재하며, 타격의 대상이 존재하는 운동이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투쟁이 있었고, 그것은 늘 뭔가 어렵고 아픈 것이었다. 그리고 노란봉투는 이른바 ‘힐링’과도 다른 정서를 지닌다. 비록 그 자체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힐링’과 노란봉투는 일견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낙오할 위기에 처한 청년들에게, 고통의 일상화 속에 아픈 대중에게 막연한 인내와 단말마적인 고통의 완화를 제시하는 ‘힐링’과 노란봉투는 그 본질이 다르다. ‘힐링’에 타자에 대한 연대가 존재하는가? ‘힐링’에서 고통은 온전히 나의 것인데, 과연 고통에 타자가 들어올 공간이 존재하는가? 도리어 ‘힐링’은 그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고 그 고통을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환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노란봉투와 4만 7천원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바로 연대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하는 작은 과정이며, 비록 노란봉투에는 적대와 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 했듯 구조의 문제를 해결 할 힘도 없다. 하지만 노란봉투와 4만 7천원에는 구조와 체제에 대한 저항을 위해 필요한 연대의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너에 대한 인식과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 연대의 힘이야 말로 권력, 돈, 물리력과 같은 물적 토대를 갖지 못한채 고통 받는 이들이 실존을 온전히 지킬수 있는 힘이다.







서울에서 문화운동 하는 후배들의 웹진인 뮤니에 글을 실어달라해서 뚝딱하고 하나 써서 보냈다. 그게 어제 올라왔기에 트랙백으로 여기에도 하나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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