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편 저런 흔하디 흔한 해넘이. 하지만 다시는 똑같은 것이 도래하지 않을 풍경에 열광하는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든 얼뜨기 로맨티스트구나 싶다. 책을 봐도 몇 장은 봤을텐데. 이 수 만명이 드나드는 곳에서 고개를 들어 저 풍경을 본 이는 몇이나 되겠나.

가끔 카메라의 렌즈가 내 눈에 담기는 이 풍경을 온전히 순간을 붙잡아 보존하고 재현하는데 택도 없는 장비라는 사실에 절망 할 때가 있다.

내가 좀 전 옥상에서 30분 간 본 해와 구름과 빛과 그림자의 향연이 그랬다.

3, 사실 가장 슬픈 건 내가 그 어디에도 마음 두고 이 보잘 것 없는 마법에 신나서 설레고 들뜬 애 마냥 전화 하고 메세지 하며 그것을 묘하고 자랑하고 같이 보고 싶었다 할 사람이, 비록 그것이 단방향일지언정, 없다는 것은 정말 날 우울하게 한다.


2017.8.29. 영남대학교 법정관 옥상 iPHONE6, 노 리터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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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뉴스 



대학본부와 탈정치라는 허위

 

이시훈(본색 소사이어티, 영남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



  우리가 정치를 사고할 때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가, 정치를 정부나 국가, 직업 정치인, 정당, 국회 등에 국한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일련의 행동들이 그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면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정치사회라는 온전히 구분되고 제한된 공간에서만 이뤄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다. 좁은 의미로 정치는 제도화된 정치사회에서 작동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널은 의미의 정치는 사실 우리 생활 저변 곳곳에 존재하고 작동한다. 선배와 후배, 선생과 학생,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나이든 이 등 너와 나 사이 그리고 사회를 가르는 수많은 분할선 만큼이나 정치는 산재해 있다.

  대학 역시 정치적 공간이다. 대학은 그 발생이 지성과 이성을 통해 교회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문주의적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근대에 들어 대학은 국민국가의 엘리트를 충원하는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대학은 좋은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러한 더 나은 국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은 대학생, 지식인 집단이 근현대의 수많은 혁명과 저항에 앞장서게 한 중요한 뿌리였다. 대학 발생의 뿌리인 인문학과 근대 국민국가에서 대학의 중요한 역할이던 사회과학은 그것이 다루는 주제 상 자연히 세계와 역사, 정치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접어두고 간단히 생각해보더라도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사람이 모여 있고, 짧게는 20년 이상 서로 다른 삶을 살던 이들이 모여 있는 이 공간에서 상이한 세계관과 정치, 사회, 문화적 의식과 행동이 분출되고 충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대학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공간이다.

  최근 성균관대학교는 세월호 유가족과 학생의 간담회를 추진한 학생들에게 학교 시설 사용을 불허했다. 그리고 이런 학교 측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간담회를 강행한 단대 학생회장에게 장학금 지급 중지라는 매우 강한 징계를 내렸다. 지난해 대구 지역 5.18 광주항쟁 유관단체들이 주최한 5.18 관련 강연회를 행사 직전에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강의실 사용을 거부했던 대구교육대학은 최근 학생들이 주최한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 대해서도 강의실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간담회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열악한 동아리방에서 열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 사건에서 대학 본부는 모두 놀랍도록 똑같은 이유를 들었다. 그것이 정치적 행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와 유사한 일이 본교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1030일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노란버스를 알리는 현수막을 교내에 부착하려한 학생에게 본부의 소관 부서에서 부착 불허를 통보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해당 부서의 팀장은 이 학생에게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 활동을 사이비 종교에 빗대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는 현수막 부착을 허가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오마이뉴스는 보도 했다.

  많은 이들이 대학에 대해 사고할 때 대학의 주체, 중요한 동력은 학생과 교수, 연구자들이이었다. 자연히 대학 본부와 교직원의 존재는 다소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모두 대학 본부의 적극적인 규제에 의해 일어난 이들이다.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왜 그들은 정치적인 것을 규제하려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 부서와 교직원들에게 정치적인 것을 판단하고 규제할 권리를 주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판단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설사 그것이 정치적이라 하더라도 대학 본부가 그것을 규제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자문해 봐야한다. 대학에서의 정치적 표현과 활동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면 대학 본부의 역할은 오히려 그런 정치적 표현과 활동들이 다원적으로 공존하고,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정치를 더럽고 부도덕하다고 기피한다. 그러면서 대학에 대해 대학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사실 반은 옳고 반은 틀린 말이다. 대학이 정치에 대해 가져야 하는 자유로움은 비평과 비판의 자유로움이며, 대학 운영이 정치적 파당의 이해관계나 입장에 매몰되거나 좌지우지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정치적 객관성이란 단순한 무당파성이 아니라 분석과 진단, 설명의 엄밀함과 객관성을 뜻한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 본부들은 이 자유와 객관성의 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이 오도된 논리로 구성원들의 정치적 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또한 대학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 그 잣대의 일관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최근 몇 해간 학교와 총학생회가 주최한 정치적 인사들의 강연회에 적용된 기준과 학생 개인의 자율적 활동에 적용되는 잣대가 다르다면, 그 누가 이 잣대를 객관적이고 정의롭다 여기겠는가? 부디 대학 본부가 이러한 왜곡된 틀부터 탈피하여, 학내에 다양한 정치적 의견과 활동이 백가 쟁명할 수 있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대를 열기를 바란다.

1. 비상구가 두번째 대자보를 부착했습니다. 어제 대자보 장인들을 모처에 가둬두고 한땀한땀 대량생산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부착조가 추운 겨울에 학교를 돌며 여러 공간에 부착했습니다. 

2. 어제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지에 올라운 성노동자의 대자보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저는 불법적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하여 그녀의 시민적 권리가 박탈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거대한 불법을 일상적으로 범하는 재벌과 권력자들에겐 분노하지 못하고, 소수자이며 약자인 그녀의 시민적 권리를 박탈하려 할까요? 한국 사회의 진보가 약자, 소수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우리의 운동은 무얼 위한 운동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일베와 같은 극우 커뮤니티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신다는 분들께선 이 대자보 운동의 함의가 무어라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대자보가 과연 단순한 민영화 저지를 위한 도구인가요? 신자유주의가 한국에서 전면화된 이후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이 사라지고, 외면과 소외가 일상화되는 현실에서 이 대자보의 본질은 우리의 아픔이 단지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는것을 외치는것 아닌가요?



<이하 전문>

안녕하지 못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영남대에도 안녕하지 못하다는 분들과 안녕하다는 분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여쭙습니다. ‘여러분, 안녕들 하신가요?’

‘안녕’이라는 물음은 지난한 일상에 찌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고액 등록금은 물론이고 토익성적, 스펙 경쟁에 우린 언제나 순응했습니다. 추운 겨울 자취방에 보일러 하나 마음대로 틀지 못하면서, 삼각 김밥과 컵라면에 의지하면서도 언젠가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텨왔습니다. 그러나 친구, 동료들과의 간단한 맥주 한잔의 여유조차 포기하며, 그 경쟁을 넘어 힘겹게 사회로 나아갔을 때 우리의 아픔은 과연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일까요? 내가 한 걸음 나아갔을 때 사회는 열 걸음, 백 걸음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우리의 등을 떠밉니다. 얼마나 더 이런 경쟁에 순응해야 우린 행복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연봉, 수입, 차 값, 집 평수가 얼마나 되어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우리 세대는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결혼과 출산은 물론 연애마저 유보한지 오래지 않습니까?

현실은 우리에게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살 것을 강요합니다. 그야말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지금 우리 삶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앞세운 철도 및 의료 관련 정책의 추진은 공공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고, 불확실한 삶을 더욱 암울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와 나, 우리들이 감당해야하는 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전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대자보를 통해 자신들의 아픔을 외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우리의 아픔은 과연 당연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과연 무엇 때문에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였는가?” 

저희는 이 순응과 경쟁, 외면과 소외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너 우리의 고통은 이제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당연한 아픔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뒤틀린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결과입니다. 전국에서 여러 대자보를 훼손하는 몇몇 사람들도 역시 그들의 삶의 아픔과 좌절 앞에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나요? 저희는 그들의 행동 역시 우리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저희는 묻고 싶습니다. 이 고통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몸부림으로 이 고통의 고리를 끊고 참된 삶을 살 수 있을지 절실하게 학우 여러분과 고민하고 싶습니다. 이 대자보는 선동이 아닙니다. 감성팔이도 아닙니다. 저항하라고 강요하지도,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 대자보는 아픈 우리의 현실과 그것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 체제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공적 담론의 장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린 성별도, 가정의 환경도, 생각도 모두 다르지만 서로 다르지 않은 고통에 직면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관용과 차이에 대해 인정하며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학우 여러분의 응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우린 이 아픔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를 찾고 싶습니다.

아픔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묻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제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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