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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그 어떤 고요함에 대하여

그 어떤 고요함에 대하여
(대구신문 2015.5.15일)

이시훈(본색소사이어티 대표)

클래식은 대개 보통의 우리들에게 그저 난해하고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예술이다. 대개 몇몇 곡은 귀에 익숙하긴 한데, 이걸 누가 작곡 했는지, 곡명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일은 그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근래 지인의 초대로 대구시립합창단의 정기연주를 보러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클래식에 대한 무지와 또 다른 이유로 약간 망설이다가 초대에 응해 퇴근길 발걸음을 대구 시민회관으로 옮겼다.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공연을 보며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의 목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에 대한 경탄, 군데군데 배치된 제법 익숙한 곡들과 함께 공연은 매우 즐겁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연의 좋음과 별개로 집으로 가는 내내 어떤 찝찝함, 씁쓸함이 맴돌았다. 그날은 세월호 참사 1주기 되는 날이었다. 3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무책임한 승무원과 자본, 무능한 국가의 방기와 언론의 생중계 속에 죽어간 참사가 1주기 되는 날에 있었던 합창 공연으로는 다소 위화감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간 지인은 오늘 나온 곡들이 사람의 인생 전반에 대한 노래이고, 그 속에서 음악의 아름다움 속에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되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게 이야기 해주었다. 물론 연주자나 합창단원, 공연기획자, 지휘자 등 개인의 선의와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적인 예술 기관에서 국가적인 비극이 있었던 날, 이를 위한 기획 하나 없다는 지점이었다. 왜 그들은 공적 자격으로 예술을 행함에도 그들이 발 딛고 있는 지역(광의로든 협의로든)의 고통, 맥락에서 출발하는 기획을 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 날의 아름답지만 찝찝했던 공연은 이런 물음만을 내놓았다.

그러던 문득 대조되는 몇몇 사례들이 떠올랐다. 통영, 제주, 광주의 사례였다. 그곳에는 한 지역의 공적인 예술 기관인 교향악단, 합창단 등이 단순히 순수한 아름다움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지역 사회가 놓여있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기억을 모티프로 한 공적인 기획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통영국제음악제의 경우 통영 출신인 윤이상 선생에 대한 기념과 추모의 의미를 가지고 출범했으며, 제주도에선 4.3 사건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배경으로 4.3 평화 음악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물론 양자의 운영 방식은 다르다. 요컨대 통영국제음악제의 경우 통영시가 조례를 통해 설립한 재단이 시, 도의 지원을 통해 운영된다. 4.3 평화 음악제의 경우는 제주 민예총이 주최하며 제주도청이 이를 후원, 지원함으로서 진행되어왔다. 두 사례의 경우 지자체와 지역 문화인들이 지역의 기억, 맥락을 주제로 한 예술을 통해 공적 기획을 만들어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 중 가장 돋보이는 사례는 2010년 5월, 광주시향의 5.18 30주년 기념음악회였다. 광주시향을 이끌던 구자범 지휘자는 30주년 기념 음악회에 연주할 곡으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선정했다. 그리고 2번 4악장의 합창 부분의 가사는 ‘거리의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원 가사의 의미와 곡의 리듬, 우리말 가사의 뜻 등을 살려 번역했다. 그리고 이 번역된 말러 2번 4악장을 400여명의 광주시민과 타지의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합창단이 합창하는 기획을 만들어냈다. 구자범 지휘자가 만들어낸 5.18 기념은 단순 ‘항쟁의 존재’, ‘항쟁의 기억’을 추념하는 것을 넘어 5월의 광주를 만들어낸 보통 사람들을 주체로 내세웠다. 장례식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말러 2번과 시민합창단의 합창을 통해 그들은 30년 전 금남로와 도청에서 무수히 나뉘어졌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콘서트 홀에 되살려내려 했다. 이런 구자범 지휘자와 광주시향의 기획은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그간 형식과 인물의 서사 중심으로 마치 박제된 듯 생명력을 잃어가던 5월의 광주가 아니라 금남로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 가던 이웃을 대면했을 때의 분노와 공포,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몰아냈을 때의 환희, 고립된 광주에서 시민들이 보여줬던 연대 등 5월의 광주에 있었을 수많은 감정과 정서들을 광주시향과 시민합창단은 그들의 지난한 노력을 통해 보여주었다.

광주시향의 공연과 대구 시립 합창단의 공연 모두 아름다운 공연일 것이다. 하지만 양자를 가르는 어떤 경계선이 존재한다. 한 공연은 시민을 주체로 만들어 3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냈고, 다른 한 공연은 1년도 안된 사회적인 고통, 기억과 무관했다. 후자에게 과연 뿌리 내리고 기억하고, 표현해야할 맥락과 기억이 없는 것일까? 인혁당 사건, 한국전 민간인 학살과 같은 현대사의 비극에서 상인동과 중앙로의 지하철 사고까지 지역의 공적 예술이 표현하고 기억하고 위로해야할 우리의 기억들 역시 존재한다.

과연 지역의 공적 예술은 그것이 발 딛고 있는 순수란 이름으로 포장된 몰역사적 침묵에서 얼마나 벗어나 지역 사회에, 지역의 역사에, 지역의 기억에 얼마나 착근했는지, 물어보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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