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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교섭(2023)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인터넷신문 평화뉴스에 기고 한 글을 재게재 합니다.

원문 링크 - http://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982&fbclid=IwAR3tU3wypCypVNF48PgN3V9ILxPSxtt3Lau6DMKCdN7Yu-dZ9wW2IyCrac0


 
 

'무책임 국가'에 던진, 무던하지만 염원 간절한

 

1.

도쿄의 관청가 카스미가세키를 한 기자가 한 손으로 전화를 걸며 넘어질 듯이 달린다. 응답 없는 전화를 붙잡고 길을 달리던 중, 어느 작은 교차로에서 애타게 찾던 이를 찾은 듯 급히 멈추고 교차로 건너편에서 눈에 초점 없이 걷는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든다. 뒤늦게 기자의 존재를 알아챈 그가 무기력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다. 그의 표정을 본 기자가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읽어버린 듯이 건너편의 그를 바라보고 그는 시선을 피하다 힘겹게 고개를 들고 소리 없이 말한다. “미안해요(고메나사이)” 그리고 기자가 다시 무언가를 외치려는 순간 스크린은 암전된다.

위의 장면은 심은경이 주연을 맡은 일본 영화 <신문기자(2019)>의 엔딩 시퀸스다. 영화는 아베 신조 내각의 최대 스캔들이었던 모리토모 학원 부정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의 언론과 민주주의 문제를 서늘하게 드러낸다.

극 중에서 심은경이 분한 기자 요시오카는 집권 여당에서 일어난 일련의 불법적인 학교 부정 설립과 여론 조작을 취재하던 기자였고, 미안하다 외친 이는 일본의 내각조사부의 관료 스기하라, 그는 학교 부정 설립을 관련 문제를 안고 자살한 선배의 사건과 자신이 행한 여론조작(마치 한국의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을 바로 떠오르게 하는)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일련의 양심선언을 하려 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자신의 일련의 활동이 내각과 정부에 대한 공격과 폭로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 밝혀지며 내각정보부장 타다 토모야는 스기와라를 불러 협박과 회유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형태만으로 충분해"

3.11 도호쿠 대지진과 이어진 후쿠시마 참사 속에서 일본은 치안 유지란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참사에 관한 정보를 통제하고 위협에 노출되는 것을 방임했다. 공공의 치안을 위해 국민의 안전을 방기하는 것, 말 그대로 수단의 안정성을 위해 목적을 방기하는 결정이었다. 경직된 관료 조직,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존재가 국민을 위협과 불안에 내몰고, 비용 논리로써 그 위협을 거대한 재난의 구조로 만드는 일련의 흐름에서 세월호와 이태원, 코로나 시대의 국가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2.

임순례 감독의 신작 <교섭(2023)>은 과거 샘물교회 선교봉사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실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9.11 테러와 이어진 미국의 이라크, 아프간 침공은 단지 머나먼 이국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를 뒤흔드는 소용돌이가 되었고, 미국 중심 세계의 일원으로 한국 역시 그 소용돌이의 구심력에 쓸려 이라크와 아프간전에 비전투병력으로 참전하게 된다. 전 지구에 걸친 테러리즘 위기와 한국 파병, 위험천만한 선교의 만남은 한국인 집단 피랍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낳는다.

<교섭>은 여러 장점을 가진 영화다. 한국 상업영화로서 드물게 중동 지역에 실제로 우리가 들어가 있는 듯 한 생동감 분위기를 코로나 직후에 진행된 요르단 현지촬영을 통해 만들어냈다. 질서 없는 도로, 낯선 말과 꾸란의 암송 소리, 자폭테러와 지뢰, 총을 든 경찰과 PMC의 모습으로 재현되는 카불과 아프간의 모습은 마치 리들리 스콧의 <블랙호크다운(2002)>에서 재현된 모가디슈에 뒤지지 않는다. 현란한 액션도,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도 없음에도 영화는 황량하고 낯설고 두려운 공간 연출만으로도 상당한 짜임새 있는 몰입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건실함과 몰입감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황정민은 그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에서 보여준 그 연기 톤을 그대로 연기하고 있다. 그의 연기는 그냥 황정민이란 이름의 감옥에 갇혔다 해야 할 지경이다. 현빈은 공조 시리즈나 <협상(2018)>의 그것을 그대로 반복 하는 느낌이다. 이는 역으로 안정적이고 익숙하지만, 진부하기도 하다. 또 극을 풀어가는 핵심축인 박태식과 정재호의 관계 역시 8,90년대 버디물의 익숙함과 진부함 사이에 서 있다. 열의에 가득 차 있고, 거칠고 아슬아슬한 현장파 출신과 엄격한 절차와 규범, 제도와 위계를 강조하는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 출신 관료파가 만나 하나의 문제를 풀어가며 갈등을 일으키고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고 닮아가며 문제를 풀어가는 버디물의 전형적 갈등 구도 역시 익숙함과 진부함 사이에서 답습하고 있다. (보는 내내 춤추는 대수사선 시리즈의 무로이 경부와 아오시마 형사의 갈등과 대립, 감응이 겹쳐 보인다.)

가장 우려스러운 지점은 사건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중요한 쟁점들, 요컨대 국가의 권고와 절차를 무시하고 위험지대에 들어간 이들에 대한 구조와 국가의 직접적인 석방 교섭이 타당한지의 문제 같은 것들은 영화에서 철저히 지워져 있다. 더불어 한층 더 나아가 서로 적대적 역사가 천년에 이르는 타 종교를 상대로 한 선교활동을 둘러싼 논쟁 역시 소거되어 있다. 영화는 철저히 이 모든 문제를 덮고 철저히 그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윤리와 사명, 갈등에만 천착하는 전략을 택했다. 아마 그런 전략을 선택한 것에는 나름의 고뇌가 있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소재가 가진 인화력과 논쟁적인 부분에 대해 너무나도 조심하고 논쟁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 같은 느낌은 지우기 힘들다.

3.

이 영화를 내재적으로 훌륭한 ‘무던함’과 여러 아쉬움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비판과 다르게 선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논점들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는 결국 최근의 이태원 참사, 더 나아가 세월호와 후쿠시마로 이어지는 ‘무책임 국가’라는 문제 속에서만 설명 가능한 부분이다. 주지하다시피 임순례 감독은 세월호 참사 이후 특별법 제정 촉구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이었다. 아마 의도하거나 혹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샘물교회 선교단의 피랍 사건을 보는 감독의 시선에 세월호가 비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감독은 샘물교회 사람들이 왜 거기에 가서 피랍되었는지라는 논쟁적인 부분을 철저히 덮고 회피하고 있다. 이는 대중적 상업영화로써 논쟁과 소모적 갈등을 피하려는 안전한 선택일 수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국가가 국민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강력한 염원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국민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국가가 국가 기구 자신의 이해관계와 입장, 관료들의 경직되고 편의주의적 처신에 따라 국민을 포기하는 역사를 경험한 동시대인으로 임순례 감독은 비록 극에서라도 국가와 정치인이 국민을 포기하지 않고 윤리와 사명감으로 뭉친 유능한 관료들이 이역만리의 타지에 피랍되어 죽어가는 국민을 지켜내는 서사를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이후 동아시아 국가 기구는 철저히 공안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코로나로부터 공중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국민을 아파트에 집단으로 감금하여 고사 시키고, 감금된 우울감에 투신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중국, 국민의 안전이란 명목으로 코로나가 집단 발명한 여객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의 입항을 가로막고 치안을 위해 3.11 당시 방사능 위협을 알리지 않은 일본, 주최 측이 없다는 이유로 누구도 책임질 게 없다며 이태원 참사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한국 정부까지, 모두 안전을 이야기하지만, 철저히 국민 개인의 안전과 존엄은 외면받고 있다.

한국 정치는 촛불 혁명이 끝난 지 5년 만에 역사적 퇴행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를 풀기 위해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과거 아시아 여성 평화기금보다도 후퇴한 안을 스스로 일본에 제시하였고, 상술한 바와 같이 이태원 참사에서 중앙 정부와 하위 행정 기관들이 보여준 모습이란 것은 굳이 첨언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죽어 나가도 근로시간은 다시 연장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퇴행의 중심에는 관료 엘리트 집단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국민의 목숨과 안전을 위해 분투하는 장재호와 박태식을 현실에서 마주 할 수 있을까?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압사당할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국민의 안전과 자존을 지키는 관료들이 자기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일임에도 책임과 사명을 등에 지고 나서는 것을 목도 할 수 있을까. 이 아쉽지만 무던한 영화 <교섭>은 우리에게 다시 ‘세월호-후쿠시마 이후의 국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