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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메시아적 정치, 신화의 정치, 영매의 정치.

메시아적 정치, 신화의 정치, 영매의 정치.

 

 

안철수가 드디어 탈당했다. 많은 이들이 안철수의 탈당과 그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에 대해 여러 논의들을 하고 있다. 안철수가 말하는 새정치에 대해 아직까지 강고한 신뢰를 보내는 이들부터 안철수가 지닌 정치인으로의 자질에 대한 비판까지 그 입장은 매우 다양해 보인다.(물론 내 주변 다수의 분위기는 안철수 좀 어떻게 정리 안되나?에 가깝다.)

 

사실 난 처음부터 안철수란 인물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나의 그런 인상과 입장과는 별개로 안철수란 존재는 근래 3년 간 한국 정치에서 새롭고 동시에 강력한 지위와 역할을 지녔었다. 그리고 이번 탈당은 안철수가 지난 2012년 대선부터 맞이한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를 둘러싼 거대 보수 야당 역학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의 열림을 동시에 의미 한다. 문재인은 과거 동교동계로 까지 거슬러올라갈수 있는 호남지역 의원들과 과거 열린 우리당을 주도했던 수도권 중진들 그리고 마치 그들을 표상하는 것으로 보이는 안철수를 제외하고 다음 총선과 대선을 준비해야 할 것이고, 탈당한 안철수가 과연 재선할 수 있을지 역시 흥미로운 요소다.

 

그런데 한편 이런 안철수 신드롬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부재해 보인다. 워낙 안철수란 인물이 보여준 근래의 행태가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엽기적이었기에 그의 존재를 정당화 하는 그 신드롬에 대한 검토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안철수와 같은 해괴한 정치 신인의 출현과 행태를 이해하는데 있어 안철수란 인물 개인의 인격과 성향, 스타일, 인적 관계를 분석하고 검토하는 동시에 안철수를 이 위치에 올린 일련의 현상에 대한 분석과 검토를 수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안철수가 법정, 박경철 등과 함께 진행한 청춘 콘서트는 현재 2030 세대에 강한 영감과 인상을 준 듯 하다. 그것이 불러 일으킨(혹은 끌어 모은) 에너지의 크기는 청춘콘서트 자워봉사자들이 청년당이라는 제도권 정당을 창당하게끔 만들었다. 물론 청년당의 미래는 다들 주지하는 사실이고, 그 정당과 안철수는 어떤 공식적 관계도 없다. 하지만 안철수와 그 동반자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만든 이야기가 청년들을 당을 만들게 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난 안철수가 청춘 콘서트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 별로 관심도 없다. 중요한건 그런 활동으로 인해 비록 단명했지만 정당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주는 지점이다.

 

다수의 청년 세대는 한국의 그 어느 세대 보다도 탈정치화된 세대다. 2030 상당수는 전통적인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지 못했고, IMF 외환위기와 2000년대 초반 카드채 위기 등 지속적인 경제적 불안정에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낸 이들이다. 96년 문민정부의 노동관계법 개정 이후 한국에 대두된 비정규직의 현실과 외환위기 이후 이뤄진 고용의 위축은 이들에게 그 부모나 직전 세대와는 다른 삶의 조건 위에 서게끔 했다. 취직도 어렵고, 출산은 실로 엄청난 용기를 요구로 하며, 그 어느 세대 보다 살인적인 경쟁을 치르고 그것을 내면화하고 정당화 하며 커왔다. 그럼에도 그 경쟁의 끝에서 삶은 극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삶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는 너무나도 형편없고 고리타분하며 부패하고 무능해 보인다. 좌절과 고통의 크기는 크고 분노는 표출되지 않지만 여러 틈틈 곳곳에 잠재되고 누적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대는 어떤 세대 보다 정보 습득 수준이 빠르고 동시에 소비주의, 특히 이미지 소비에 대한 지향이 강하다.

 

안철수는 그런 면에서 좋은 장점이 많다. 자수성가 한 자본가이고 고학력자이지만 뭔가 악질 자본가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나름 착하고 세련되고 성공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그럼에도 기성 자본의 논법처럼 노력을 이야기 하지 않고 그 분노를 세련되고 건전하게 표출하게끔 이야기 한다. 아마 이런 안철수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현상을 김태일 교수님께서는 짱돌에서 종이돌로의 변화라고 지적하신바 있다.

 

그런데 한국 정치의 특이점은 이런 안철수를 일약 정치 사회의 한 가운데로 끌어 들인다. 한국 정치는 행태, 구조, 과정, 체제와 제도의 변화 보다는 인적인 변화, 특히 새롭고 참신한 인물의 수혈을 통한 이미지 개선을 선호한다. 그리고 안철수가 젊은 세대에 대해 이미지 소비주의적이고 변화를 말하지만 급진적이지 않은 소구력을 가지며 동시에 깨끗하고 새로운 인상을 지닌 채로 부각되었기에 안철수가 새로운 정치적 상품으로 대두 되었던 것 같다.

 

난 여기에서 한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한국 정치가 철저히 메시아주의적이고 어떤 신화를 통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명박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 메시아였다면 안철수는 세련되게 좋은 말 하고 거칠지 않게 뭔가 바꿀 수 있을것 같은 메시아였다. 이명박이 과거 한국 자본주의 고도화 시기의 신화로 그 존재를 정당화 시킨다면 안철수는 민주화와 자본주의 고도화가 이행된 이후 시점에 나타는 정보통신 산업에서의 자수성가와 고학력, 청렴과 소박의 신화 속에서 커갔다. 정치적으로 새 인물을 영입하는 손쉬운 변화에 대한 선호와 안철수가 가진 메시아적 요소는 한낱 IT 기업 개발자 및 경영자를 순식간에 유력한 대권 주자로 만들어 놨다. 아 저 사람이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을것 같다.

 

그런데 다수의 메시아주의가 그렇다. 그것은 구체적 현실에 대한 전망 없이 구원의 이미지만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만약 그것이 영적 구원이 아니라 형이하학적인 정치적 구원이라면, 그때 구체적 현실에 대한 전망 없이 메시아 개인의 덕목과 미덕 그리고 구원의 이미지만으로 나아간다면 그 끝에는 파산만이 기다린다. 파산까지의 과정이야 홍수전처럼 폭발적일수도 있고 허경영처럼 허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지와 신화만으로 유지되는 메시아는 언제나 파산했다.

 

물론 메시아로 안철수를 이야기하기에는 참 어려운 시대다. 현 대통령이 바로 영매이기 때문이다. 그는 안철수나 이명박과 같은 자기 신화의 서사가 아니라 그가 받드는 신의 서사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역 대통령은 정치인 보다는 교황과 더 비슷한 존재다. 그 역시 현실에 대한 전망과 기획이 아니라 비극적으로 죽어버린 신의 이름과 존재를 배경삼아 통치하고 있다. 통치가 정치와 민주가 아닌 영매의 논리로 이뤄지는 판국에 메시아 정도면 양호하려나 싶다.

 

어쨌든 난 영매도 싫고 메시아도 싫다. 영매와 메시아의 퇴락과 철수가 만들어낼 거대한 공백지는 부디 또 다른 영매와 메시아가 아니라 나와 다르지 않은 뼈와 살에 같은 온기가 흐르는 인간의 논리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의 기획과 전망 그리고 그 변화의 서사 속에 살고 싶다. 그런 면에서 21세기의 우리 정치는 여전히 강력한 탈주술화 투쟁이 필요한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