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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 잉여

동주(2016)

동주(2016)




어느 자리 잃은 자의 죽음


(스포일러 억수 많음)


  대학원 동학들과의 오랜만의 회합을 마치고 홀로 극장으로 걸어가 이준익의 <동주>를 보았다. 생각보다 스크린 앞에 많은 이들이 차있어 묘한 기대감이 돌았다. 마치 2월 초 <캐롤>을 처음 보던 당시 생각 이상으로 가득찬 상영관을 마주했을때의 그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매우 담담하고 담백하다. 이준익 감독은 화려한 연출이나 기교, 비주얼 보다는 좀 더 담백하고 생명력 있는 시각으로 시공간과 사람을 만들어냈다. 사실 영화의 백미는 연기와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영화가 실존 인물의 전기영화이기에 그 원 인물에 대한 해석과 그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여 서사를 뽑아낼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허나 불행히도 시인은 너무나도 현세에서의 시간이 짧았고2시간 조금 모자란 시간 동안 연출해야할 이야기들이 상당히 타이트해졌던것 같다. 만약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감독이 이야길 해석하고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 구조로 묶어 내기 쉽지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봤다.

  한편 연기가 눈에 들어온다. 연기도 역시 화려하기 보단 담백하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인의 친구이자 사촌형제인 송몽규를 맡은 배우의 연기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친구이자 서로를 끌어가는 존재지만 둘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송몽규는 자존을 상실한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하는 투사이자 그 거대한 목표와 이념을 위해 모든 것을 점차 도구화 해나가는 인간이다. 그는 이 억압과 야만의 시대에 시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지만 한편으로 시와 시를 쓰는 자신의 친구를 사랑한다. 둘 사이의 긴장과 갈등, 화해와 동행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얼개이다. 자연히 송몽규라는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치 않은 이름은 사실상 영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간다. 윤동주는 그를 취조하는 일본 형사의 말마따나 송몽규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기에 영화의 이야길 추동하는 것은 윤동주가 아니라 송몽규다. 그렇기에 송몽규라는 인물을 해석하고 드러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영화의 키포인트였을텐데 송몽규를 분한 배우의 연기는 마치 그 시기의 어느 투사가 생명력을 얻은듯 했다. 문인이 되고 싶지만 조국과 민족의 현실 앞에 처절한 혁명가로 살아가는, 이광수로 부터 잉태 되었지만 이광수를 죽이고자 하는 그 삶의 고뇌와 번민, 갈등, 결기를 너무나도 잘 보여줬다.


  <동주>는 대사와 대화가 너무나도 좋은 영화다. 그리고 마치 방백 처럼 영화의 시점(時點)에 따라 주연 배우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인의 시는 영화 속의 공기와 주인공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결국 송몽규와 윤동주의 관계다. 둘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현세를 떠난 동년배이자 혈족이며 친구다. 하지만 둘의 삶과 세계를 대하는 입장은 다르다. 연희전문을 다니던 시기 그들의 자취방에서 문예지를 만들며 송몽규와 윤동주의 시론(詩論)은 충돌한다. 송몽규는 인민들에게 생각을 알리는데시가 부적합하고 시가 감성에 젖는다 비판하지만 윤동주는 이에 반발한다. 윤동주는 시의 급진성을 이야기하고 송몽규는 이 사실과 시인의 시를 사랑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시인의 시론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송몽규에게 문학은 철저히 마치 퇴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그것처럼 프로파간다와 투쟁의 도구일뿐이다. 둘의 이런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송몽규가 처음 체포되었을때다. 감옥으로 면회간 송몽규는 이화학당을 다니는 이여진이 옥천의 뜻 있는 유지이기에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할 수 있으니 윤동주에게 관리를 하라 하지만 윤동주는 사람을 그렇게 도구로 보냐 반발한다. 정말 이 둘의 이런 갈등과 긴장은 서로에 대한 묘한 부러움과 사랑과 뒤섞여 더욱 격렬해 보인다.

  한편 윤동주, 수사 형사, 대학을 찾아온 군인 세 사람의 관계 역시 흥미롭다. 송몽규와 다른 이유로 수사 형사는 윤동주의 시를 비난한다.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적 관점에 찌든 이 파시스트 형사는 윤동주의 시를 무력하고 감성적이고 전쟁에서의 승리에 방해되는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며 마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에 비교한다. 서정주의 문학이 마치 민족의 강인함과 위대함을 약화시킨다고 탄압하던 어느 시기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윤동주의 시는 지배와 피지배, 저항과 억압 사이의 어느 공간에서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다. 사실 이 시점에서 어떤 제법 지난 과거의 분노를 회상해본다. 자칭 민족주의 투사를 자처하던 그 선배는 지식인이 당과 조직의 나팔수여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일본 수사 형사로 표현되는 전체주의의 괴물과 맞서기 위해 괴물이 되어 버린 존재. 그 사이에서 세계의 감각과 인간의 내면을 고뇌하는 이들은 모두 개량이고 투항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송몽규는 자신이 문학을 사랑함에도 자기 속의 문학을 끊임없이 죽여나간다. 그 선배도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었을까?

  결국 윤동주는 그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송몽규는 마지막 거사를 앞둔 자리에 윤동주를 데려가지 않는다. 윤동주가 함께하고 싶다고 함에도 그에게 가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한다. 교토의 동료들은 윤동주를 모두 피한다. 같은 동지로 친구일 수 있는 삶들은 무슨 이유로 그를 피하는 것일까?


  윤동주가 영화에서 체포되기 직전, 시인의 유명한 싯구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가 낭독된다. 시인이 경험한 디아스포라이자 혁명과 저항의 시대에 온전히 투신하지 못한 시인으로써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자신이 존재 할 온전한 자리를 갖지 못한 그 아픔과 갈등들을 이야기 하듯이 육첩방은 남의 나라를 되뇌인다. 혁명과 투항,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등 무수한 이분법 속에서 온전히 강요된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던 '자리 잃은 시인'의 죽음이었다. 


거대한 폭력과 야만으로 회귀하는 시대 속에서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리가 우리에겐 있었던가...시인의 <사랑스런 추억>이 흘러퍼지던 도쿄의 트램에서 함께 시를 이야기한 미쿠와 시인에게 지적인, 인간적인 나아감의 계기를 준 다카마스 교수 그리고 이화학당의 이여진 정도가 영화에서 동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환대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쿠미와 다카마스의 조력은 시인을 시인으로 서게 하였고 국적과 종족, 신분을 넘어선 연대로 시인의 삶을 버티게 하지 않았을까. 시인은 조직이 검거되고 함께 도피하자는 송몽규에게 자신은 지금 함께 갈 수 없으니 시모노세키에서 만나자라고 이야기한다. 송몽규의 조직이 검거되었다면 자신에게도 손길이 닥칠것임에도 그는 누군가의 그 선의, 환대를 저버리지 못한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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