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실 배움이나 지적 능력이 약해서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책을 읽지 못한다. 전통적인 문장과 다른 그들의 문장을 읽을때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왔다. 그래도 훌륭한 형님 모시고 열심히 귀동냥한 결과일까? 지난번 날 좌절 시켰던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머리맛과 뒷부분 몇페이지를 찬찬히 읽는데 성공했다.

사실 읽은 소감이란건 뭐랄까 "와 내가 해냈다. 글줄 몇페이지를 드디어 읽을수 있다"라는 것이라기 보다는 약간의 소름 돋음 같은것이었다. 이 날은 국정 교과서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 확인이 있었던 날이다. 그리고 그날 갑자기 이걸 시도 해보고 싶었고, 머릿말엔 아래와 같은 글줄이 있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저 난해하고 복잡한 녀석이 나한테 온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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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진태원 역,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린비, 2014. 12~13p.

(전략)
그러나 그들과 함께, 함께-존재하기 일반을 어느 때보다 더 우리에게 수수께끼처럼 만드는, 이러한 거기에 함께가 없이는 어떠한 타자와 함께-존재하기도,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없다. 단지 이러한 유령들과 함께 존재하기는 또한, 단지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기억과 상속, 세대들의 정치일 것이다.

만약 내가 환영들과 상속에 대해, 세대들 및 환영들의 세대들에 대해, 곧 현존하지 않으며 우리에 대해서나 우리 속에서 또는 우리 바깥에서 현재 살아 있는 것들도 아닌 어떤 타자들에 대해 길게 말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아직 그것이 있지 않은 곳, 아직 그것이 거기에 있지 않은 곳에서, 그것이 더 이상 있지 않은 곳에서(그것이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곳에서라고 이해하기로 하자), 그것이 결코 법이 아니며, 법/권리로 환원될 수 없는 곳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타자를, 또는 아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현재 살아 있는 것들로 존재하지 않는 타자들-이들이 죽은 이들이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든 간에-를 원칙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어떠한 윤리도 어떠한 정치도 (혁명적인 정치든 아니든 간에) 가능하지 않고 사고 불가능해 보이는, 그리고 정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순간부터, 환영에 대해, 심지어 환영에게 그리고 환영과 함께 말해야 한다. 모든 현재 살아 있는 것을 넘어서있는, 현재 살아 있는 것을 이접(disjointe)시키는 것 안에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이미 죽은(그들이 전쟁의 피해자든 아니든 간에, 정치적 폭력이나 다른 폭력, 국민주의적·인종주의적·식민주의적·성차별적 절멸이나 다른 절멸의 피해자든 아니든 간에, 또 자본주의적인 제국주의나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적 억압의 희생자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의 유령들 앞에 있는 어떤 책임의 원리 없이는 어떠한 정의도-어떠한 법도락 말하지 말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법‘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거나 사고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살아 있는 것/생생한 현재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비동시대성 없이는, 현재 살이 있는 것/생생한 현재를 은밀하게 어그러지게 하는 것 없이는, 거기에 있지 않은 이들, 더 이상 현존하지도 살아 있지도 않거나 아직 현존하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사람들과 관련된 정의에 대한 존중 및 이러한 책임 없이는, “어디에?’, ‘내일은 어디에?, ”어디로?“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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