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뇌피질의 낭비

가득한 가덕과 요새사령부로 가는 길

가득한 가덕과 요새사령부로 가는 길


낡은 집 요새사령부로 부터 전시포스터


가득한 가덕 전시 포스터


1. 요새 사령부로 부터


  이동근 선생님은 가깝게는 돌아가신 재일 조선인 문필가 서경식 선생님을 통해 만들어진 관계이다. 서경식 스쿨의 여러 선생님들 중 한분이시며 또 이 인연으로 우리 연구소에서 한 통일 특강에 두 차례 어려운 걸음 해주시기도 하셨다. 나는 선생님을 설명할때, 전형적인 다큐사진작가의 이미지 보단 인류학자와 같은 면이 강하신 분이라고 한다. 선생님께선 당신이 프레임에 담는 대상과 누구보다 밀착하려 애쓰신다. 결혼이주여성과 그 가족들을 다룬 <초청장>을 위해 해운대구청의 결혼이주여성 한글 교실에서 무급으로 소사 일을 맡으시고 그것이 한글학교 선생이 되고 또 가까운 관계로 이어지며 선생님의 <초청장>은 만들어졌다. 탈북 이주 여성 음악단인 <아리랑예술단>을 작어하기 위해 실제로 그들과 동행하며, 삶을 함께 하셨다. 일전에 부산 구덕포의 선생님 작업실에 갔을때, 아리랑예술단의 여성 예술인이 ‘오빠’라고 전화를 와 안부를 묻는 장면은 선생님의 작업이 다큐멘터리 작업자와 피사체 이상의 관계성에 근거를 둔다는 점을 방증하는 그런 장면이었다.

  선생님의 자동차는 운행거리가 40만 킬로가 넘는다. 10만이 넘으면 차를 바꾸는 세태 속에서 우리가 40만이라는 마일리지에 압도되어 경탄하자, 선생님께선 ”이 차는 40만은 되야 질이 든다“라며 웃으셨다. 누가 돈을 주지도 않는, 또 상업적으로 잘 팔리지도 않는 사진이지만 거대한 역사의 구조 속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에 대한 시선과 증언의 의지 속에서 선생님은 동해안 7번국도를 오가며 펀치볼과 양구, 인제의 민북마을 주민들의 삶을 담고 김포의 장기수 안학섭 선생님을 담고 전방의 K-밀리터리 키치라 할 만한 왜곡된 모습들을 담으셨다.

  그런 선생님의 가장 근래 작업 중 하나는 가덕도다. 부산의 정관계, 재계를 중심으로 밀양 대 가덕도 신공항 광풍이 잦아드나 했지만, 이 미친 광풍은 결국 가덕도 남부에 공항을 만드는 정치적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후 부산 경남의 여러 환경 단체들이 가닥도 신공항이 가덕도 고유의 생태계와 경관, 자연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밝혀왔고, 이러한 생태적 가치들과 무조건적 개발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공항에 맞서왔다. 하지만 이동근 선생님의 작업은 좀 달랐다. 선생님께선 단순히 가덕도라는 섬의 생태적 가치나 경관의 아름다움, 자연 풍경의 수려함, 그 고유성에만 머무시지 않았다. 선생님이 주목하신 것은 외양포를 중심으로 한 섬이 근대 제국주의로 부터 휩쓸려온 과정 그 자체다. 20세기 극 초입 섬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본군은 대한해협과 진해만의 요새화를 위해 지금의 외양포 등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집을 형태만 남은 대한제국을 동원하여 말도 안되는 가격/혹은 무상으로 수용하고 그 자리에 해안포를 중심으로 한 방어 요새를 구축해갔다. 시모노세키나 사세보에서 그랬듯 대형 해안포와 섬 곳곳의 감시 초소와 땅굴을 파고 쌓고, 병사들의 막사와 창고, 지휘소 등의 건물들이 속속들이 들어섰다. 처음엔 가덕이었으나 인근의 저도 등 크고 작은 섬에서 시작해 영도와 용호동, 기장에 이르는 해안에 그렇게 방어요새가 구축되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선생님의 작업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을 넘어 인류학자들이 하는 에스노그라피와 같다. 가덕도를 중심으로 한 공간 속에서 이뤄져온 일본군의 흔적과 기록들, 당시 사진들을 아카이브 하며 가덕도라는 공간이 표상하는 제국 일본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조직되는지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군의 병사들이 조선에서의 생활과 그 풍속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드러내고, 당대의 서간과 잡지 등을 중심으로 좀 더 미시적으로 군국주의의 공기를 재현하셨다. 또한 선생님은 일본의 패전과 해방 이후 일군이 쓰던 막사와 군 시설에 들어가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과 삶의 기록들을 한편으로 사진으로  한편으로 영상으로 또 아카이브를 통해 축적하셨다. 일군의 땅을 이어 여전히 토지는 한국군의 소유이면서 지상권만 얻어 집도 제대로 고치지 못한채 기형적이고 고유한 주거 형태에서 살아가는 삶의 풍경을 그렇게 스케치 해오셨다. 주민들의 일상 깊이 들어가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이야길 듣고 그들의 삶을 보는 일, 그들과 밥을 나누는 일은 일회적인 몇 차례의 방문과는 다른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우리는 손님이 자주 온다 하여  자기 삶의 모습들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그 의례적 거리를 넘어 삶에 다가가는 노력, 그를 통해 가덕도 외양포의 주민들, 펀치볼과 민북마을을, 결혼이주여성들을 담아오셨다.

2. 가득한 가덕


  가득한 가덕, 재밌는 언어 유희다. 가덕도엔 무엇이 가득한다. 우리의 직관은 어떤 모습을 볼때 그것을 가득하다 하는가, 그리고 그 모습은 가덕도에서 볼 수 있는가? 가덕도는 화려한 섬이 아니다. 오랜 시간 연륙교가 없어 섬은 단절되었고, 제국 일본에 이어 진해만이 중요한 군사 전술의 근거이기에 인근의 다대포 등과 더불어 군사 지역으로 묶여 있었다. 가덕도가 우리에게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한편으론 부산 강서와 진해에 걸친 부산신항 건설에 따른 협수로의 매립과 이를 위한 배후 산업-주거단지, 고속도로 등이 연결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론 가덕도를 경유하여 부산 신항 일대와 거제도를 직결하는 거가대교가 건설된 무렵일 것이다. 그 이후에도 가덕도는 그 섬 자체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저 거제도로 가는 길에서 본격적인 교량이 시작 되기 전의 휴게소 정도의 이미지였다. 당연히 이 섬은 고유한 삶의 형태와 자연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가득함’의 직관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무엇이 가득한 것인가? 이 전시의 오프닝파티이자 부산의 기록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가득한 가덕>에서 이동근 선생님과 이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덕도의 존재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동근 선생님의 사진과 영상은 이미 지난 가을의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위에서 말하였고, 다른 분들은 회화나 설치 등을 통해 작게는 가덕도를 마주하고 가덕도를 둘러싼 이 소용돌이 속에서 느낀 자신의 인상을 재현하기도 하며, 가덕도의 고유한 어로 방법을 화폭에 담기도 하며, 가덕도의 메마른 고목들을 가공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덕도의 가득함을 보여주셨다. 가덕도엔 우리가 흔히 가득하다 느끼는 도시의 화려함, 마천루의 웅장함, 상업화된 아름다움은 없지만 산업 사회와의 일정한 거리 두기 속에서 만들어진 고유한 산과 나무, 꽃들의 세계가 존재함을 참여 작가님들이 보여주신듯 하다.

  물론 의문은 있다. 이날 오프닝 파티에 동행한 철학연구자 권영민 형은 공항 이후의 생태라는 가능성에 대해 닫혀 있음을 이야기 했다. 방사능이 하나의 재난이지만 그 방사능에도 불성은 존재하는가란 물음 속에서 자연이 생태가 생명이 원래의 주어지고 고정 된 형태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권영민 형의 물음은 공항 이후 가덕도의 자연과 생태가 그것을 파괴한 공항과 어떻게 또 새로이 구축된 생태를 만들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한 개방이었던것 같다. 물론 이에이후 있은 이동근 선생님과 권영민 형과 함께 한 차담에서 선생님께선 그것은 죽음의 다른 과정이며 방사능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이 있을수 있지만 그건 결국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이라 답을 주시었다.

3. 다시 대구로


  다르게 되기의 가능성을 지적한 권영민 형과 달리 오프닝 파티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전시의 과정, 그 이전 이동근 선생님의 개인전, 전시의 내용과 메세지 등을 보며 자연히 대구국제공항 이전 문제로 생각이 이어졌다. 가까운 분들은 알지만 난 대구국제공항의 군위 의성 이전 절대 반대파이다. 왜 물류 허브 공항으로 신공항이 불가능한지 지난 대선에 보고서를 올리기도 했고(ㅅㅂ 배달사고 낸 사람들 다 어디계시노), 시민의 공항을 지키는게 대구를 토건과 금융 자본의 한탕에 이은 엑시트에 맞서는 정치적 운동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입장이다. 우리의 그간 공항 반대 운동은 어땠는가, 첫째 많은 부분을 사법적, 절차적 문제를 중심으로 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시민들의 의사를 묻는 투표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거나 추진 과정의 문제를 지적하는게 주가 아니었었나 싶다. 군위나 의성의 주민들과 연대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나 생각하면 내가 모를수는 있지만 내 단편적 기억과 인상 속에 그런 모습은 못본듯 하다.
  공항은 엄청난 번영과 발전의 서사를 약속하지만 익숙한 삶의 풍경을 회복 불가능하게 바꿔버리는 일이다. 과수가 자라던 과수원은 계류장이 되어 종일 요란한 제트엔진의 울림이 과수에 약치던 소리를 대체하고, 농번기 트랙터가 지나가던 마을의 좁은 길들은 굉음을 내며 중력을 이기려는 비행기들의 활주로가 될 것이다. 왜 김포공항의 대체제가 영종도와 용유도였고, 김해공항을 대체하여 새로운 번영을 만들겠다는 광풍이 가덕도를 희생양으로 삼는가. 도시라는 권력 공간의 시선 바깥에서, 별로 저항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나마의 반발과 저항도 쉬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 섬이다. 하지만 대도시와 닿아 있는 농촌 지역은 다르다. 최초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에 반대하던 주민들의 저항으로 시작 된 산리즈카(三里塚) 마을 투쟁은 아직도 공항 활주로 사이와 인근에서 거주와 생활을 통한 저항을 이어가고 있고, 공항의 확장 문제에 맞서고 있다. 분명 산리즈카의 주민들이 그러하였듯 의성이든 군위든 그곳에서도 공항으로 인해 고향을 등져야 하는 것을 거부하는 삶들이 있을수 있는데, 우린 충분히 그들을 만나고 연대하지 못했던게 아닌가. 특히 이동근 선생님의 작업과 오프닝 파티 당일의 말씀들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대구국제공항 이전지는 여전히 어디에 짓는지 미지수다. 의성 군위 접경이던 것이 군위가 되고 또 그것이 특수목적법인을 통한 건설이 좌초되며 표류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린 군위가 대구의 온갖 필요하지만 더럽고 불편하고 시끄러운 것들을 떠 맡는 우리 안의 자가 되지 않도록 그곳을 만나야 하지 않았었나. 그런 생각이 이어진다. 산리즈카 마을의 투쟁도 결국 주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만 그들과 연대한 신좌파 학생 조직들의 연대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하지 않았나....

4. 뱀다리


  난 더이상 활동가도 아니고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구태여 틀거리에 끼워 맞춰 보면 그저 오지랖 넓은 시민 9 정도다. 하지만 공항과 같은 공공적 의사 결정 문제에 있어 싸움의 방식은 한 가지 방법론만 있지 않다. 물론 사법적이고 절차적 문제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엘리트 집단의 역할도 필요할 것이지만 정치적 에너지를 만들고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해당 지역에 연대하는 일들도 필요하고, 그런 과정을 기록하고 재현하고 표현하는 일들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떠들고 비판하는 대문자 지식인들의 역할 역시 존재한다. 생태 문제가 중요하지만 생태 문제만으로 가덕도 공항을 막을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한 가지 문제만으로 싸우는건 불가능하고 싸움의 성격을 협애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에어부산 문제를 중심으로 가덕도 투쟁의 새로운 방향을 열고자 하는 내 친구 박상현의 노력은 이동근 선생님과 참여 작가님들의 노력 만큼이나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다.

  더불어 가득한 가덕 전시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부 과격하고 원리주의적인 이들로 부터 가득한 가덕 전시가 공격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재현하고 기록하는 일은 투쟁의 일환이지만 투쟁의 도구일수만 없다. 그 속에도 자율적인 관점과 이해가 존재할 수 있다. 더불어 한국의 열악한 문화예술 환경 속에서 관의 제한적이고 작은 지원이나마 없다면 창작 활동을 순수 민간과 운동사회의 지원만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관으로 부터 받은 지원이란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타협과 절충을 마치 배신인것 처럼,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하는 말들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인다. 티끌 만한 차이와 이견, 다른 방법을 견디지 못하고 현실의 복잡한 역학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조정과 절충을 배신이라 하는 운동에는 무슨 미래가 있을까. 착잡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