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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질병일기. #1. 졸림을 변호 하는 것.

내 의식은 또렷하나 눈꺼풀은 중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마치 지구의 가장 깊은 심연의 핵이 나의 눈꺼풀을 불러내리듯이 그것이 점점 시야를 덮어온다. 어느새 시야는 눈꺼풀이 만들어내는 어둠에 잠식되고, 그것과 맞서려 아둥바둥 거리던 나의 의식은 그 어둠 속에서 보이는 깊은 어둠으로 침강해 내려간다. 만약 지구가 블랙홀에 들어가는걸 지표에서 본다면 그런 느낌일까?

 

기면증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야기 하다가 이야길 듣다가 책을 읽다가 강의를 듣다가 걷다가 영화를 보다가 심지어 밥을 먹다가도 가끔 마치 댐의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트리듯 잠의 홍수가 나를 덮쳐 온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뇌파를 찍어볼까 신경과적 검사를 해볼까 아니면 정말 기면증이 있는걸까? 스스로 자문자답하지만 구태여 이것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구태여 질병 하나를 내 몸에 공인 한다 해서 놀랍지 않을 정도로 내 신체는 만신창이인데 굳이 번거로운 노력으로 한 줄의 이름을 더 할 필요가 있을까. 직업이 환자인 사람이 이정도 태도는 가져줘야 한다. 아무렴.

 

덕분에 늘 놀림 받고 규탄 받는다. 하지만 이 무게는 인간이 불굴의 정신력과 필사의 노력으로도 극복 할 수 없다. 2009년 2학기 어느 야간 강의에서 지금의 지도교수님이 진행하시던 정치경제학 강의에서 교수님께 네그리의 노동가치설에 관해 장대한 질문을 하고 교수님께서 80여분에 걸쳐 설명해주시고 돌아보니 내가 자고 있더라는 이 무시무시한 도시전설을 당사자로 겪는 심정이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난 이 상황의 불가피함을 설명해야 하고 동시에 설명 할 수 없다. 설명 한다고 해명되지 않고 해명한다고 설명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라리 중력의 영향이라면 아인슈타인은 중력 가속도 값을 새로 쓰는 것으로 해결될지 모르지만 정상 신체에 대한 관념의 지배 하에서 이것은 양해 될지언정 해명 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잠이 많고 적음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의 질과 별개로 늘 충분히 자는 편이고 오고가며 세시간의 출퇴근은 또 다른 충분한 잠의 공간이다. 대구도시철도 공사에 이정도면 지하철비가 아니라 숙박비를 내야 하는게 아닐까 스스로 물어야 할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 모를 잠의 위협은 사회적 평판을 좀 먹는다. 진지한 상황, 웃기는 상황, 로고스의 시간, 에로스의 시간, 타나토스의 시간을 가리지 않는 졸림은 사람들에게 무례함을 뜻하고 동시에 무수한 단서조항과 각주를 달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요구로 한다.

 

질병을 앓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정상 신체의 관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나의 예외적인 상황을 인준 받기 위한 노력과 해명, 단서와 각주의 번잡함을 요구로 한다. 설사 묻지 않더라도 늘 나는 내 상황이 정상 신체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으며 조금 다르지만 문제 없음을 해명 할 마음의 태세를 요구로 한다. 상황의 불가피성을 일상적으로 소구 하는 삶은 질병이 주는 통증과 고난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실 정상 신체는 그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 대구의 화학섬유 공장과 금속 부품 회사에서 녹아 내리고 잘린 손가락의 갯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방적 공장과 광산의 노동자들이 겪었을 호흡기 질환들 그리고 무수한 노동관계와 생활 세계에서 생긴 '상실'을 생각하면 이 정상 신체란 것은 사실 아주 온전하고 정제된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정상 신체는 신화적이고 동시에 상당히 계급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 자체는 의사들의 몫이지만 질병 이후의 고통을 바라보는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 그 속에는 자신의 잘린 손가락, 무너진 코, 돌아간 눈을 설명해야 하는 이들이 정상 신체 신화에서 얼마나 주변화 되는지 만큼 정치 적 문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권력과 자원을 가진이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유구한 역사적 경험을 생각해보면 이건 매우 자명한 문제가 아닐까.

 

우스개 소리로 내 직업은 환자라 이야기 한다. 몇 대 주요 질환으로 신경외과, 안과, 내분비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부터 소화기내과, 간담췌내과 등등...무수한 부문들의 발전을 위하여 내 한 몸 바치고 있다. (그러니 내 몸이 내수진작과 총수요의 증대를.... 가즈아 승수효과!!) 더불어 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질병이 주는 통증과 불편함과 또 다른 사회적 통증과 불편함을 야기한다. 이것은 무엇이 질병인가라는 관념과 의식이 운동한다는 문제의 연속이자 정상이라는 신화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만약 해방과 인간들의 각성이 있다면 그것은 환자로써 내 몸에 대해 각주를  채워넣은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세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