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누가 흙수저인가?
지난해 한국 사회를 풍미한 어휘를 몇 개 뽑아 보자면 ‘흙수저’는 단연코 그 윗자리 어딘가를 점할 것이다.나날이 악화되는 청년 세대의 삶의 조건과 개선 될 가능성이 희박해 지는 미래 전망, 불평등하고 왜곡된 기회 구조 속에서 부모 세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자원이 후속 세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는데 대한 자조섞인 메시지가 담긴 이 말은 한동안 잠잠했던 청년 세대 담론에 다시 활기를 불어 넣었다.
선거란 그것의 내적 생리 상 어쩔수 없이 그 당시의 가장 뜨거운 감자를 다룬다. 2012년 대두된 이른바 청년 정치는 4년의 시간이 지나 흙수저라는 이미지와 결합하였고, 어느새 흙수저는 청년 정치인들에게 자신이 후보가 되어야 하는 중요한 정당성으로 자리 잡았다. 보수 야당의 청년 경선에서 여러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의 궁핍을 뽐냈으니 이 흙수저 경쟁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 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흙수저라는 이미지, 참 묘한 이미지다. 뭐랄까 흙수저는 시간을 거쳐 의미와 개념이 명료해지도록 주변이 탈각되거나, 입론을 거쳐 그 실체와 의미를 가진 ‘개념을 내포한 이미지’라기 보다는 그 실체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이미지다. 이 말은 즉 흙수저라는 말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심지어 자의적으로 활용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실제 스스로 흙수저이며 그들의 대표라 자처했던 이들의 재산이 드러나자 곧장 ‘당신이 흙수저 맞느냐?’는 물음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논박 속에서 그들이 정당성을 소구하고 정립해나가는 과정은 ‘진짜 흙수저’에 대한 논쟁으로 바뀌었다.
정치적 과정에서 대중이 일상적으로 접하기 쉬운 말, 익숙한 말을 쓰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유행한다는 이유로 불명확한 말에 편승해 스스로를 정당화 하는 일은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얄팍한 이미지에 기대는 것이 되고 그 얄팍함은 언제든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실 이런 불분명한 이미지와 수사는 늘 문제였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말을 매개로 하는 정치체제이고, 인민에 대표받은 데마고그들이 주도하는 체제이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수사 의존 자체를 탓하긴 쉽지 않다. 문제는 얄팍 할 수 있는 이미지와 수사에 의미와 내용을 부여하는 과정이고 이를 자신의 ‘정치인’으로 존재 정당성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의 문제다.
한때 정당 활동을 함께했던 친구가 주요 정당 비례대표 후보들의 평균 재산을 올렸다. 아마 이유는 자명할 것이다. 그들의 적은 재산이 그들의 정당성을 방증한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적은 재산이 그들이 흙수저인 듯 보이게 하고 이는 흙수저 당을 자칭하는 자당에게 좋은 정당화 도구가 될 수 있기에 그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흙수저 정치인 논쟁의 핵심은 “누가 순수 흙수저냐?”에 있지 않다. 흙수저라는 사회적인 현상을 자신과 일치시키려는 무리한 혹은 다소 자기 존재와 부합하지 않는 옷을 입으려 한 것이 문제인 것이며, 개인의 재산(상속과 증여를 포함한)의 다소(多少)와 상관없이 자신이 흙수저로 불리는 청년 세대의 문제 해결에 필요하다는 자기 정당화의 실패다.
개인의 재산의 많고 적음, 사회경제적인 배경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우리가 목도하였듯이 그런 것을 넘어선 이들이 역사에 존재한다. 맑스나 엥겔스가 비교적 괜찮은 삶의 조건과 사회경제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 가장 고통 받는 이들 곁에 있었지만 반대로 한국의 노년층 다수는 그들이 처한 최악의 사회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의 가장 강고한 지지자로 존재한다. 누구나 스스로를 흙수저와 동일시 했던 이들의 실상과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황당함과 허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진짜 흙수저는 누구냐?” 만큼이나 그들의 비교적 유복한 사회경제적 배경과 삶의 조건에도 어떤 대표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청년 정치에 임하는 지여야 하지 않을까?
지난 제 19대 총선 당시 본격화된 ‘청년 정치’는 이제 새로운 변곡점과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 청년 정치란 것이 주요 정당에서 일정정도 제도화 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내용과 실체는 여전히 부실하며, 정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청년 정치인들이 정치를 통해 살수록 있게끔 하는 장치들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와중에 청년 정치인들이 취약한 수사와 이미지가 아니라 좀 더 분명하고 탄탄한 개인의 서사와 정치적 전망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고 대표성을 소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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