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는 대리인이 아니다.

최근 국 선언에 관해 인제대와 울산대에서 벌어진 일들은 상당히 주목할만한 경우이다. 두 곳 모두 총하갯ㅇ회는 공통적으로 학생들의 여론 수렴의 부족을 근거로 시국선언 참여를 거부했다. 물론 시국에 대한 인식과 접근, 입장에 차이는 있지만 이 두 대학의 총학은 모두 공통적으로 학내 여론 수렴의 문제를 거부의 이유로 들었다.

문득 예전의 두 사례가 생각난다. 하나는 내가 졸업한 학과의 일이다. 내가 졸업한지 좀 되어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터졌을 당시 난 아직 학과에 남아 있는 후배들에게 왜 영남대 사학과(아 나의 사학과는 죽고 역사학과라는 남이 거기 있더라..)는 왜 이 문제에 대해 대자보나 입장이 안나오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의외였다. 일부에서 이에 대해 학과 학생회의 참여를 촉구하였지만 당시 과 회장은(사실 누군지도 모른다 ㅜ 난 화석..) 전체 학생들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당면한 역사학계에 대한 모욕과 도발을 넘겼다.
이에 되게 비교되는 사례는 바로 2007년 대선 당시 내가 있던 문과대 학생회가 2007년, 2008년 집행부의 이름으로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경우다. 우린 어떠한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린 학생회를 과연 정파적으로 전유한 것인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학생회를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유한 것이라면 난 욕을 먹어도 싸겠지만 우린 학생회가 단순한 대리인, 대행자가 아니란 판단 하에 그렇게 일을 진행했다. 과거 전대협 이래 현재 한대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통적 학생운동의 흐름 속에서 학생회는 학생들을 대표하되 모든 학생들의 의견을 대리하는 곳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입장이 존재하였고 이 입장과 의지를 바탕으로 학생들을 대표했으며 학생들도 그런 학생회 집행부를 선출했다. 이는 일종의 리더십과 팰로우쉽 관계가 구축되었고, 학생회의 고유한 입장과 판단에 대한 재량권이 부여된 것이다. 고로 우리 07년 일촌맺기 학생회 집행부나 08년 참 학생히 집행부가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였다 하여 우린 단과대 2800명의 정치적 의사를 박탈하거나 왜곡하였다고 보기 힘들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차이다. 대의 기구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이해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즉 대의 기구 자체의 주체성, 의지가 존재하는 것이고 대중은 대의기구를 이를 바탕으로 선출하고 지지한다. 대중들 속에는 이 의지, 주체성의 내용에 반대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입장과 의지의 차이가 입장이 다른 이들의 주체성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전체 학생들에 대한 여론수렴이란 논리는 왜 등장한 것일까? 이는 결국 학생회 더 나가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정당 정부 등을 대리자로 이해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즉 그 조직 자체의 의지, 주체성을 소거하고 구성원들의 개별적 의견 모두를 수용하고 따르는 역할로 학생회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학생회의 정치적 문으력, 무채깅ㅁ에 대핸 정당화 기제인 동시에 일부에 의한 전유를 근거로 공공성을 무력화 하는 시도이다. 그런데 어느새 이런식의 대리 논리가 팽배하다. 여기서 우린 민주주의가 '단지 모두의 이야길 듣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리더십을 부여받고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면 때론 대중의 의지나 요구와는 다소 시간차가 있더라도 먼저 책임지고 치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후에 평가받고 결과에 대해 책임 지면 되는 일이다. 이러한 구조 원리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고 고민하지 않기에 '여론수렴'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안그래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학생회의 타임테이블을 고려할때 여론 수렴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임기를 마무리 할 것이 자명한데도 여론 수렴을 핑계 대는 것은 그냥 하기 싫다는 것에 대한 우회적 선언이다. 그리고 이 대리 논리는 이런 정치적 무책임, 무능력, 면피를 정당화 하고 있다.


11월 1일오후 5시 30분 작성

담론이 사라진 대학(영대신문 2014년 9월 1일자 1602호 기고)

 

 

세월호 참사와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으로 이어진 2014년의 여름은 우리 정치,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윤 추구 의지에 파묻힌 무책임한 자본을, 규제개혁이란 이름으로 최소한의 장치들마저 풀어버린 정권의 무책임, 위기에 처한 이의 구조에 실패하고 세월호의 과적과 부당한 선박개조를 사전에 막지 못한 관료조직의 무능, 보도윤리를 상실한 언론의 현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다 못해 그것을 폄훼하고 모욕하며 시민적 연대성을 잃어버린 대중의 모습, 시민적 연대성을 잃어버린 대중의 모습을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볼 수 있었다. 한국을 찾아온 교황의 모습과 행동에 대한 대중적 열광 역시 우리 사회의 공적 책임과 타자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얼마나 상실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교황은 단지 예수의 가르침대로 훌륭함, 선함을 행했을 뿐인데, 대중은 그에 열광한다. 그것은 그 사회에서 결핍된 무언가를 교황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교황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단지 그의 개인적 훌륭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국적 맥락이 존재했다. 이렇게 우린 한 계절을 계속된 비애와 열광으로 보냈다.

하지만 4월 이후 이어진 이런 대중적 비애와 열광의 물결에도 비켜선 채, 놀랍도록 고요함을 유지하는 공간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바로 지역의 대학들이다. 비단 이번 일들만이 아니다. 지역의 대학들은 전국적인 정치, 사회 이슈에 대해 어떠한 공론의 장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수년 간 경험을 돌아볼 때 본교를 위시한 지역의 대학에선 학생회는 존재하지만 학생사회의 흔적은 희미하며, 커뮤니티는 존재하지만 공론의 장은 형성되지 않았다. 토론의 열기와 활기가 사라진 대학의 공간은 놀랍도록 고요할 따름이다. 단지 몇몇이 개별적인 메아리만을 이어갈 뿐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구조의 재편은 대학생에게 치명적인 위기를 안겨주었다. 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하긴 점점 어려워졌고, 경제적 이유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유보한 3포 세대는 이제 흔한 현상이 되었다. 현실의 압력이 점점 개인들에게 강하게 다가오고, 각자도생의 경향이 심화될수록 대학생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침묵하기 시작했다. 현실의 개선을 위해 말 하거나’, ‘참여 하는 것이 회의적이고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는 담론의 뿌리였던 대학에선 더 이상 어떤 공적 논의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전 시기부터 담론의 생산과 유통을 맡아온 학생운동과 학생언론들은 그 지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학생들이 대학 내 담론에 매력을 갖지 않게 됨에 따라 이들은 존재 이유에 큰 도전을 받게 된다. 이런 담론상실의 시대는 대학사회의 탈정치화를 야기했고, 그 정도가 심해질수록 학생회와 학생언론들의 의미는 위축되었다. 이들 기구들은 이제 마치 학교 홍보실 내지 부속기관, 학생민원상담실 정도로 전락했고, 이력서에 한 줄 더 적기 위한 스펙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당장 지난 1학기 마지막 영대신문이 계절이 지나가는 대학 곳곳에 지금까지 방치된 채 남아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학사회에서 담론이 그 기능과 역할을 잃었다고 보기엔 힘들다. 비록 대학생의 존재가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것 같지만 다른 한편 여전히 대학생, 20, 지방대 등 다양한 공통기반에서 대면하는 고통과 문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힘들어 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이 있는 한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할 필요는 분명해진다. 대학에서공적인 논의를 복권시켜야 한다. 물론 현실은 비관적이다. 공적 담론의 자리는 소비주의적인 상업문화에 침식되고 있고, 일간베스트 저장소와 같은 반지성적인 반달리즘이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전망을 찾고 모색할 책임이 우리에겐 있다. 우선 말 할 의무와 권리를 지닌 이들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선에 대학언론들이 서야한다. 끊임없이 짐짓 불편할 수 있는 문제제기와 질문을 통해 화두를 제시하여야 한다. 담론은 단순히 개별적으로 나열된 언어들과는 다르다. 지금 이 시대에 그 담론을 조직하고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바로 대학 언론이다. 비록 현실은 녹록치 않으나 대학언론이 지닌 본래의 존재 이유가 살아있는 한, 대학언론은 말 할 수 있는 지평을 열기 위해 싸워야 한다. ‘모른다는 자기 방어의 논리와 싸워야 하며, ‘말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반지성주의와 싸워야 하며, 이 고요와 침묵에서 이득 보는 이들과 맞서야 한다. 이를 통해 대학생들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에 대면하고 그것에 대해 말 할 권리를 확대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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