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1. 시간과 허구

 

모든 인간은 역사적이다. 아니 시간성을 가진다. 그건 대부분의 인간이 지닌 어떤 숙명 같은 것이다.(예외적으로 내외부적 요인으로 그것을 상실, 박탈당한 이들이 있을 수 있기에 '모든'이 적확하지 않을 수 있다.) 시간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긴 연속선상으로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 내일 죽을것 처럼 오늘은 사는 것이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왜냐면 우리가 오늘을 불태운다 하더라도 대개 압도적으로 높은 확률로 우리는 내일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 공부하고 뼈 빠지게 일하고 아프고 늙고 슬프고 하면서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기다리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단 그 내일이 어떤 '내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편 이 선형적인 시간은 강력한 선택의 딜레마로 우리를 제약한다. 이 시간은 적립, 이월할 수도 없으며, 리와인드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층위를 다층적으로 구성할 수 없으며, 오로지 한 채널만 존재하는 생방송 마냥 흘러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선택이라는 압박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선택은 오늘과 내일 사이의 절충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흘러 간다.

우리의 존재를 규율하는 시간으로 부터 이탈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매우 특이한 하나의 현상에 그 단서를 두고 있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특성으로 부터 해방되는 순간들이 있다. '', '문학', '예술' 등등 일시적으로나마 시간을 초월해서 다른 시간을 살아볼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간은 허구의 시간이다. 우리가 그 허구의 시간과 유사한 내일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재현하기 이전까지는 그것은 허구다. 그리고 이 꿈, 문학, 예술의 세계를 연장시켜 자기 세계를 허구로 규정하면 우리는 이 시간으로 부터 자유로울수 잇을지 모르겠다.

우메자와 리카는 이곳에 있지만 그 진짜 삶은 존재하지 않은 듯하다. 그에게 남은것은 자기 삶을 진실히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 외곽에 어떤 인정과 그것을 포함한 욕구의 충족을 붙이는 것만 남아 보인다. 남편은 있지만 두 사람의 부부 관계를 그다지 순탄해 보이지 않고, 직장 사람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관계에서도 그는 그다지 진실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거짓되어서라기 보단 진실을 구성할 수 있는 자기를 구축하는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을까?그런 그에게 코타와의 만남은 이 가짜 세계 내에서 진짜 욕망, 진짜 쾌락의 등장이었던 것 같다.

 

 

2.은행과 돈

 

그리고 그녀에게서 가짜 세계의 균열은 코타와의 만남만 아니라 ''에서도 나타난다. 우리 생활 속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대부분은 금속 본위의 화폐가 아니다. 그리고 대개 이것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고도의 사회적 분업과 신뢰 관계 속에서의 합의의 형태로 존재하며, 물성이 희박한 숫자의 형태로 이동한다. 사실 우리가 만지는 돈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돈이 아니다. 이 돈은 그 자체로 어떠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지니지 않는 허구의 재화다. 그리고 리카는 자기의 욕구 충족을 위해 1만 엔을 슬쩍하고, 그 순간 그녀에게 이 허구의 화폐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건널꺼야? 말꺼야?



3. 아이카와와 스미

 

아이카와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물질적 허영의 세계를 이미 우메자와보다 먼저 깨달은 인물이며, 그녀의 묘한 변화를 가장 먼저 캐치한 인물이다. 한편 그녀는 지점 차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이며,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차장과 함께 매출 전표 조작을 함께 하고 있다.

스미는 지점의 베테랑이다. 25년 이상을 근속했고, 지점의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 원칙주의자다. 그는 이 현실 세계에 충실하여 25년간 어떤 일탈을 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우메자와 리카의 범행을 알고 그녀의 행동과 선택들을 상상했고, 나름 '밤샘'이라는 일탈을 한다.

영화의 후반부 파멸이 시작되는 진행에서 출근 혹은 현실 세계로의 복귀를 위한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는 우메자와에게 그녀는 다가와 '건널 거야? 말거야?'라는 의미심장은 답을 남겼고,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에서 우메자와는 "가야죠, 가야하는 곳으로"라고 답한다. 그리고 은행에서의 모든 것이 드러난 직후 스미와 짧은 대화를 한 우메자와가 지점 2층의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기 직전 자신을 붙잡는 스미에게 우메자와는 "같이 갈래요?"라고 묻는다.

아이카와는 이미 이 허구와 같은 현실세계에서 퇴락한 존재이며, 스미는 이 세계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 둘은 우메자와의 어떤 면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스미가 우메자와의 조금 정직하고 그 불안을 견디며 나이 든 인물이라면 아이카와는 퇴락한 채 불안과 긴장에 쫓기는 우메자와가 아닐까.

 

그랬더니 밤 새는 거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더군.

그럼 다음날 피곤하잖아.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정년퇴직하고서야 해볼까 했거든. (극중 스미 유리코)

 

이 스미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영화 내내 가장 눈에 들어왔다.

 

* 덧: 뒤늦게 안 사실이 있어 남긴다. 원작인 소설에는 아이카와 게이코와 스미 유리코라는 캐릭터가 없다고 한다. 이 두 캐릭터는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이 창작한 캐릭터이다. 이 이야길 네이버에서 서비스 하는 영화 포토 다이어리에서 보고 아이카와와 스미가 우메자와의 양 극단일 수 있다는...혹은 다른 두 모습일 가능성에 확신을 얻었다.

4. 그래서 진실했나? 그리고 정말 자유로웠나?

 

난 리카의 모든 일탈이 단순한 바람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이 영화가 소재적으론 바람난 주부 사원의 은행 공금 횡령일지 모르지만 단순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나 스스로 물어본다. 귀 잘 안 들리고 정신이 혼미한 채 '구매'만이 남은 할머니의 1만엔을 빼돌리는 순간 리카는 은행과 돈이 가진 어떤 사회적 신롸와 합의라는 현실의 무게를 잠시 벗어던졌다. 그렇게 화장품을 샀지만 그녀는 돈을 바로 메꿔 넣었고, 화장품은 사람들을 의식해서 고웅 물품 보관함에 넣어둔다. 한편 아이카와가 마치 자신을 겨냥한듯한 말을 하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적어도 그 시작은 단순한 바람이라기 보다는 어떤 자기 추구 혹은 어떤 자아 지향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한편 코타와의 관계도 그렇다. 저것이 과연 사랑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자신이 없다. 물론 중간에 변화를 겼었고 적어도 그 시작은 순수한 열의였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무언가 '충족'을 바라며 관계를 이어온 것은 아닌지. 특히 리카가 코타에게 그 할아버지의 돈을 횡령해서 전해주는 순간부터 둘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횡령이라는 불안한 토대가 구축한 가상의 세계와 리카의 자아 그리고 서로의 몸에 대한 탐닉은 아니었는지....

마지막 스미와 리카의 대화 속에서 리카는 스미에게 처음 횡령한 순간 매우 몸이 가볍고 자유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도리어 말하면 우리가 대개 현실에서 느끼는 일정한 제약과 규율 그리고 그것들의 무게감에서 벗어나 그 외부에 있는 쾌락 세계, 탐닉의 세계에 그가 들어섰음을 뜻하진 않을까? 난 그 대답을 그것이 자유롭냐는 듯이 바라보는 스미의 표정 속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결국 리카는 돈도, 신뢰도, 코타도, 남편도, 직장 동료도 모두 잃는다. 이것은 자유의 대가라기 보단 현실의 자기를 파괴해가며 구축한 가상의 욕망과 쾌락, 허영이 지배하는 허구의 세계에 대한 대가가 아닐지......

그는 현실이 거짓이라 하지만 그 대신 구축한 세계는 그가 거짓이라 하는 세계로부터 만들어진 불안정한 욕망과 쾌락의 세게였고, 아마 그 세계를 만드는 힘은 결국 어떤 자기 만족, 자기 인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 어렵다.

 


 

5. 자유로움이란 무엇일까

 

처음에는 5번 항을 비워뒀다. 왜냐면 사실 돈, 욕망, 욕구, 인정, 허영으로 부터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그 착취와 수탈의 부정의를 이야기하는 나지만 유감스레 나 스스로도 나를 안밖에서 규율하는 돈, 욕망, 인정, 허용,물질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여전히 강력하게 구속되어 있다.

5항의 제목을 왜 확고한 의문형으로 했는지 돌이켜 보면 결국 이건 내가 나 스스로에 남기는 물음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그것들로 부터 초연할 수 있기 갈망하지만 결국 나 역시 언제나 비슷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묻고 싶다. 궁금하다. 자유로워짐이란 무엇인가? 

 


* 같이 갈래요? 장면의 스틸컷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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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각자의 가치는 포켓 속의 동전들처럼

언젠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무적인 착상에 단순한 집착만을 요구받으며

고도의 물질문명의 지배를 받으며

어쨌든,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기형도 시, 종이달 -
-천지인 곡,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中-


  모던타임즈, 사회경제 문제를 다루는 학술공동체인 ‘자본주의연구회’에서 3년간 활동하면서 매년 봄이면 봄마다 신입회원 교육, 대중아카데미 등의 행사에서 마주쳐온 영화이다. 이 그저 오래되 보이고 무성에 흑백 등 요즘 우리가 보기에 그저 비추하고픈 비주얼의 영화가 어찌해서 매년 마다 너무나도 당연한 듯 나와 우리 동료들의 마음속 스크린에 비춰지는 걸까?


  모던타임즈는 장기 19세기와 단기 20세기를 상징하는 두 가지 경제체제의 이행기, 그 중에서도 특히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테일러주의적인 생산관리 기술은 헨리 포드에 의한 대량생산의 혁신을 일으키고 노동자는 숙련된 생산과정의 주체가 아닌 그저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극도로 단순화된 노동과정을 수행하는 도구화, 객체화 되던 시기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시대적인 모습들(객체화된 노동, 실업자, 대공황, 파산, 시위)을 매우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처음 공장에서 보이는 생산과정에서 채플린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공정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자의 모습,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노동조건을 통제하고 심지어 화장실, 식사까지 관리하려 드는 기업, 거대한 스크린을 통한 오너의 관리 등의 모습을 우선 볼 수 있으며 특히 노동자가 생산과정에 종속된 모습을 극대화 시킨다. 이런 방식으로 초기 포드주의적 생산양식을 비판한 것은 물론 기계에 매몰된 기계공의 모습으로도 우리는 비록 희화화 되었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채플린의 날카로운 기계문명의 비인간성(양이 인간을 먹는다는 인클로저 시기의 풍유처럼 기계가 인간을 먹는다는 식의 풍자가 보인다.)에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채플린의 비판은 단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노동도 하지 않은 채 거대한 모니터로 모든 것을 관리, 통제하는 회사의 오너, 삶에 대한 절박함 속에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해산시키며 심지어 고다드가 배역한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경찰, 국가권력을 은근하지만 날카롭게 비판한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듯 이런 비판정신을 담은 장치들은 속된 말로 '까놓고' 전재하지는 않는다. 화면의 미장센 속에서, 채플린의 몸짓 하나하나에, 그 주변 이들이 처한 상황 하나하나 속에 그 장치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저 웃긴 예전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지만 그 커트 하나하나가 마무리 될 때마다 그 이야기들이 단순한 슬랩스틱이 아닌 비판정신과 세상에 대한 풍자가 가득한, 웃음 속에 안타까움이나 슬픔들이 전제된 웃음, 즉 블랙코미디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 답답한 현실을 개탄하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특히 영화의 종반부를 대표하는 세 가지 키워드 속에 그런 희망과 대안에 대한 메시지들이 보인다. 우선 첫 번째 키워드는 사랑이다. 채플린과 고다드, 고다드와 채플린 모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게 싹튼 사랑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 사랑이란 키워드는 난간없는 백화점의 벼랑끝이라는 모순된 공간에서 보여주는 채플린의 묘기를 고다드가 잡는 장면에서도 드러나느것 같다. 백화점이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상징적 존재 속에서 펜스가 없는 낭떠러지라는 상상하기 힘든 이질적 공간에서의 묘기가 채플린이 연기한 캐릭터의 그동안 삶이라면 고다드와의 만남은 그런 그의 위태롭고 안쓰러운 삶에 작은 전환점과 활로를 안겨준 장면으로 밖에 볼수 없을것 같다. 두 번째는 개성의 가능성이다. 고다드의 주선으로 취업한 고급식당에서 채플린은 서빙에서 형편없는 솜씨를 보여준다. 하지만 뒤 이은 공연에서 채플린이 부른 티티나는 손님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받게 된다. 이는 물질문명의 지배 속에서 생산 과정에 개인이 종속되고 그러면서 질식되어 가고 있는 개인의 개성과 재능이 가진 가능성이다. 그토록 공장에서도 형편없고 조선소에도 엉망이던 극중 채플린의 삶에 유일한 박수를 남긴 그것이야 말로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는 문이 아닐까? 세 번째 가능성은 체념과 순응을 넘어서려는 의지의 길일 것이다. 모던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은 작은 도로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만약 그들이 물질문명과 억압적인 국가 속에서 체념하고 순응하였다면 불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다드가 쫓기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 자신이 만드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야 말로 그런 새로운 길을 향한 여정을 출발 할수 있는 힘이 아닐까? 그것이 혁명의 길이든 디아스포라의 길이든 그 새롭고 다름에 대한 모색이 현실을 이겨내는 길이라고 채플린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특히 이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길의 메시지는 그의 불우했던 유소년기와 1차 대전, 대공황 등의 치열한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을 어떤 이념 혹은 조직의 지도가 아닌 삶을 통해 체득하고, 그 속에서 생각하던 새로운 희망과 길이 의도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아든 것은 아닐까?


  모던타임즈의 모던(modern)의 어원이라 알려진 Mode란 단어에는 새롭고 기존의 것으로부터 탈피했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채플린이 살았던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삶들은 어떤 근본적인 모순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모리스 돕이 자신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을 비꼬며 ‘자신은 예비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를 어떻게 우아하게 착취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며 말 한 것에서 유추 할수 있듯이 단지 그 모순을 가리는 그 ‘우아한 정도‘의 차이만이 지금의 시대와 채플린이 살던 시대의 차이가 아닐까? 여전히 다수의 기업들은 노동자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노동자 개개인에게 마치 부품 맞추듯이 프로크테스크의 침대와 같은 기준을 강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현재에서 우리에게 프로크테스크의 침대를 벗어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어쩌면 채플린은 70년 전에 말한 것은 아닐까? 개개인의 개성과 특기, 주체성이 발휘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을 말이다.



2009.03.31 이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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