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각자의 가치는 포켓 속의 동전들처럼

언젠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무적인 착상에 단순한 집착만을 요구받으며

고도의 물질문명의 지배를 받으며

어쨌든,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기형도 시, 종이달 -
-천지인 곡,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中-


  모던타임즈, 사회경제 문제를 다루는 학술공동체인 ‘자본주의연구회’에서 3년간 활동하면서 매년 봄이면 봄마다 신입회원 교육, 대중아카데미 등의 행사에서 마주쳐온 영화이다. 이 그저 오래되 보이고 무성에 흑백 등 요즘 우리가 보기에 그저 비추하고픈 비주얼의 영화가 어찌해서 매년 마다 너무나도 당연한 듯 나와 우리 동료들의 마음속 스크린에 비춰지는 걸까?


  모던타임즈는 장기 19세기와 단기 20세기를 상징하는 두 가지 경제체제의 이행기, 그 중에서도 특히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테일러주의적인 생산관리 기술은 헨리 포드에 의한 대량생산의 혁신을 일으키고 노동자는 숙련된 생산과정의 주체가 아닌 그저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극도로 단순화된 노동과정을 수행하는 도구화, 객체화 되던 시기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시대적인 모습들(객체화된 노동, 실업자, 대공황, 파산, 시위)을 매우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처음 공장에서 보이는 생산과정에서 채플린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공정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자의 모습,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노동조건을 통제하고 심지어 화장실, 식사까지 관리하려 드는 기업, 거대한 스크린을 통한 오너의 관리 등의 모습을 우선 볼 수 있으며 특히 노동자가 생산과정에 종속된 모습을 극대화 시킨다. 이런 방식으로 초기 포드주의적 생산양식을 비판한 것은 물론 기계에 매몰된 기계공의 모습으로도 우리는 비록 희화화 되었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채플린의 날카로운 기계문명의 비인간성(양이 인간을 먹는다는 인클로저 시기의 풍유처럼 기계가 인간을 먹는다는 식의 풍자가 보인다.)에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채플린의 비판은 단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노동도 하지 않은 채 거대한 모니터로 모든 것을 관리, 통제하는 회사의 오너, 삶에 대한 절박함 속에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해산시키며 심지어 고다드가 배역한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경찰, 국가권력을 은근하지만 날카롭게 비판한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듯 이런 비판정신을 담은 장치들은 속된 말로 '까놓고' 전재하지는 않는다. 화면의 미장센 속에서, 채플린의 몸짓 하나하나에, 그 주변 이들이 처한 상황 하나하나 속에 그 장치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저 웃긴 예전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지만 그 커트 하나하나가 마무리 될 때마다 그 이야기들이 단순한 슬랩스틱이 아닌 비판정신과 세상에 대한 풍자가 가득한, 웃음 속에 안타까움이나 슬픔들이 전제된 웃음, 즉 블랙코미디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 답답한 현실을 개탄하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특히 영화의 종반부를 대표하는 세 가지 키워드 속에 그런 희망과 대안에 대한 메시지들이 보인다. 우선 첫 번째 키워드는 사랑이다. 채플린과 고다드, 고다드와 채플린 모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게 싹튼 사랑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 사랑이란 키워드는 난간없는 백화점의 벼랑끝이라는 모순된 공간에서 보여주는 채플린의 묘기를 고다드가 잡는 장면에서도 드러나느것 같다. 백화점이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상징적 존재 속에서 펜스가 없는 낭떠러지라는 상상하기 힘든 이질적 공간에서의 묘기가 채플린이 연기한 캐릭터의 그동안 삶이라면 고다드와의 만남은 그런 그의 위태롭고 안쓰러운 삶에 작은 전환점과 활로를 안겨준 장면으로 밖에 볼수 없을것 같다. 두 번째는 개성의 가능성이다. 고다드의 주선으로 취업한 고급식당에서 채플린은 서빙에서 형편없는 솜씨를 보여준다. 하지만 뒤 이은 공연에서 채플린이 부른 티티나는 손님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받게 된다. 이는 물질문명의 지배 속에서 생산 과정에 개인이 종속되고 그러면서 질식되어 가고 있는 개인의 개성과 재능이 가진 가능성이다. 그토록 공장에서도 형편없고 조선소에도 엉망이던 극중 채플린의 삶에 유일한 박수를 남긴 그것이야 말로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는 문이 아닐까? 세 번째 가능성은 체념과 순응을 넘어서려는 의지의 길일 것이다. 모던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은 작은 도로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만약 그들이 물질문명과 억압적인 국가 속에서 체념하고 순응하였다면 불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다드가 쫓기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 자신이 만드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야 말로 그런 새로운 길을 향한 여정을 출발 할수 있는 힘이 아닐까? 그것이 혁명의 길이든 디아스포라의 길이든 그 새롭고 다름에 대한 모색이 현실을 이겨내는 길이라고 채플린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특히 이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길의 메시지는 그의 불우했던 유소년기와 1차 대전, 대공황 등의 치열한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을 어떤 이념 혹은 조직의 지도가 아닌 삶을 통해 체득하고, 그 속에서 생각하던 새로운 희망과 길이 의도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아든 것은 아닐까?


  모던타임즈의 모던(modern)의 어원이라 알려진 Mode란 단어에는 새롭고 기존의 것으로부터 탈피했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채플린이 살았던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삶들은 어떤 근본적인 모순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모리스 돕이 자신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을 비꼬며 ‘자신은 예비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를 어떻게 우아하게 착취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며 말 한 것에서 유추 할수 있듯이 단지 그 모순을 가리는 그 ‘우아한 정도‘의 차이만이 지금의 시대와 채플린이 살던 시대의 차이가 아닐까? 여전히 다수의 기업들은 노동자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노동자 개개인에게 마치 부품 맞추듯이 프로크테스크의 침대와 같은 기준을 강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현재에서 우리에게 프로크테스크의 침대를 벗어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어쩌면 채플린은 70년 전에 말한 것은 아닐까? 개개인의 개성과 특기, 주체성이 발휘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을 말이다.



2009.03.31 이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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