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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일기. #2. 이것은 프링글스가 아니다.

2000년 3월의 혜화동의 모습을 기억하나요? 마로니에 공원은 풍문한 무성한 자유와 로맨스는 오간데 없이 비둘기 똥과 숙자 형님들만 그득했고, 서울 지하철은 그 특유한 냄새만을 지독히 풍겼다. 창백한 서울 지하철 역사의 벽돌들을 헤집어 올라올때의 빛은 밝았지만 그 계단 위의 세계는 내가 알던 익숙한 그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내 삶의 질병사에 한 획을 그은 그 놈과의 본격적인 대전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아마 처음으로 올라간 날이 화이트데이였던 모양이다. 비장한 편지를 이후 내 인생에 씻을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아이에게 남기고 서울로 왔고, 어느새 프링글스와 포카리스웨트가 준의약품의 지위로 내 머리맡에 놓였다.


포카리스웨트는 쉽게 납득이 가지만 세상에 프링글스? 잘못 적은거 아닌가 아니면 프링글스라는 보조식품 내지 약품이 있는건 아닐까? 아니다. 그 프링글스 맞다. 웃는 콧수염이 크게 그려진 그 원통형의 프링글스......


주된 병이 일으킨 Side effect(아 이 느낌을 부작용이란 말이 대채허기 어렵다 주장하고 싶다) 덕분에 내 몸의 전해질 체계가 무너지고 탈수와 과수분 상태가 번갈아 일어났다.(지금도 사실 이 반복은 그 강도가 위험하지 않을 뿐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프링글스의 강력한 짠맛과 이온음료 내의 전해질은 무너진 수분대사를 지켜주는 말 그대로 준 의약품으로 간호사에게 추천 받았다.

세상에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비만과 비만과 맞물린 온갖 성인병으 원흉이신 감자칩께서 일으킨 화학적 작용이 내 몸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덕분에 합법적으로 프링글스권을 획득한 나는 이후 오리지널만 아니라 어니언&사워크림, 스파이시, 비비큐 맛 등의 버라이어티를 서울대 병원 소와 병동에서 만끽 할 수 있었다.

지금도 프링글스는 내게 약의 위치일까?

답은 당연히 아니요다. 한때 용이한 나트륨 섭취의 도구로 활용되던 프링글스는 이제 와서 내 지방간과 혈압의 원수가 되어 있다. 늘 그 동그란 통과 그 통을 감싼 종이의 감촉이 내 손을 유혹한다. 이제는 심지어 편의점 자체 브랜드로 프링글스의 시뮬라르크들이 내 손을 협공해오고 있다. 아 그 짭짤한 맛의 매혹에 견고하게 견딜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다. 그 귀여운 원통의 공세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은 그 프링글스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은 자이거나 이미 죽은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간에 마블링이 생기고 대개 저혈압에 시달리는 환우들과 달리 난 정상수준 내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프링글스가 겪은 위상의 변화는 무척 흥미롭다. 사물과 그것이 야기하는 길항작용에 따라 내게 그 사물의 의미와 위치가 변화한다는 것. 하지만 아픈 이들은 안다. 한때 자기 삶의 의미이던 무수한 것들이 병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사실 그 병은 프링글스가 유비하는 무수한 유혹들의 산물이기도 하다. 내가 먹은 것이 나를 구성한다는 아주 단순한 유기체적 사고를 해보면 결국 내 병의 많은 지분은 나를 살게 한 프링글스의 몫이기도 하다. 아 이정도가 되면 약이 병인지 병이 약인지, 내가 프링글스를 바꾼건지 프링글스가 나를 바꾼건지 헛갈린다. 장자도 이건 쉽게 답을 못하리라.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