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선거 평가(1)




출처: 오마이뉴스(http://omn.kr/jexp)



0. 이거 쓰고 두세 편 정도 똥을 더 연재해보겠습니다.

 

1. 내 첫 선거는 21살이던 2006년 제 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였다. 이후 2007년과 12년 대선, 08,12년 대선, 1014년 지방선거를 겪으면서 지역구 투표는 몰라도 비례대표나 전국단위 선거에는 확고한 지지를 결정하고 기표대에 들어섰다. 아마 이번 총선은 내가 정당 지지를 확고히 하지 않고 기표구를 들대까지 정당을 결정하지 못한 첫 선거였다. 정의당과 녹색당 사이 열 칸 남짓을 오가며 십 수초를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녹색당에 한 표를 던졌다. 정말 혹시라도 재수 옴팡지게 좋아서 녹색당이 비례 한 석을 얻는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난 그게 적어도 한동안 이뤄지지 않을 일이란 것을 아는데도 녹색당에 투표했다. 정책이나 강령, 이념상 나와 먼 이 당에 난 왜 투표 한 것일까? 이건 내 스스로 해명해야 할 일인것 같다. 그냥 버리는 바에 주자...이런 심정이었던 건 아닌데

 

2. 5시가 넘자 선거 특집 방송이 개표 모드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30분 후면 투표가 종료되며 출구조사가 공표된다. 두둥

 

갑자기 전화기가 올린다. 두현이형이다. 형님은 민주당 중남구 김동렬 후보 쪽에 결합해있고 형수와 함께 투표 참관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되겠노?"

 

형님 목소리엔 불안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160석 정도 안 되겠습니까? 180석은 공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린 선거 과정에 나온 무수한 여론조사와 언론들의 보도에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박근헤 정부는 사실상 민주화 이후 최악의 정권이었고 정무, 정치, 행정 전반에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한 채 상대에 대한 배제로 일관해왔다. 당연히 심판 받아 마땅하지만 야당은 법정관리인 김종인이 당의 정체성에 손을 대고 비례대표를 개떡같이 만들어 놨고, 안철수라는 희대의 반 정치주의자와 그 추종자들은 민주당 내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호남 토호들을 끌어안아 고립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당파를 형성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무능과 무력을 보완할 강한 왼쪽 날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민중연합당으로 갈라진 채 사실상 유의미한 정치적 자산을 가지지도, 행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누리당의 압승은 필연적인 듯 했다. 개헌이 되느냐 마느냐가 관건일 정도였다.

 

여의도연구소가 내놓은 분석 결과에 사람들은 집권 여당이 약자 코스프레 한다고 조소했다. 하지만 그때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 선거의 또 다른 승자가 여의도연구소였다는 사실을...

 

출구 조사 이후 형님과 나는 다시 통화했다. 우리는 한편 흥분하면서 한편 불안해했다. 왜냐면 추구조사에서 공표된 결과와 우리의 예측은 그 편차가 너무 컸다. 내가 예측한 150석 후반~160석 초중반과는 30석 이상...형님이 예상한 것과는 50석 이상 차이가 났다. 당연히 불안하고 걱정될 수밖에.

 

3. 이번 총선은 일견 세 개의 심판론과 하나의 결집론이 지배했다. 수도권은 새누리 심판론, 호남의 더민주 심판론, 영남의 지역독식 심판론 그리고 수도권에서 나온 놀라운 민주당으로의 결집이 선거를 지배했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은 2004년보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아마 3파전이 아니었다면 몇 석을 더 얻었을 정도였고 충청 대전도 동서로 양분하여 할거하는데 성공했다. 춘천에서 선전했고 원주를 석권할 뻔 했다. 영남에서 양산 1, 김해 2, 부산에서 5, 대구에서 1+1석을 획득했으니 2004, 2012년의 성과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비례대표 득표 차이다. 두 당 모두 비례대표 13석을 획득했다. 여기서 놀라운 건 비례대표 획득표가 국민의당의 민주당 보다 30만 표 이상 많다는 사실이다. 충청권과 경남권 정도에서 더민주가 비례 득표를 더 했고 대부분 지역에서 근소한 차이, 수도권과 호남권에선 제법 큰 차이로 국민의 당이 우위를 점했다. 그런데 수도권 지역구에서 국민의 당은 더민주의 표를 잠식하는 효과를 낳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수도권 대부분 지역에서 야당 유권자가 지역구는 더민주, 비례는 평균 4.5:5.5로 국민의 당이 더 만흥표를 가져갔음을 의미한다. 즉 단순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 하에서 야권 유권자 대부분이 엄청난 전략 투표를 한 것이다. 일부 국민의당이 새누리의 표를 잠식한 효과도 있어서 지역구는 더민주가, 비례대표에선 국민의 당이 약진한 것이다.

 

즉 더 민주는 선거는 이겼지만 투표 행태에 대한 분석 상으로는 절대 이긴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단순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라는 현재의 선출 방식이 준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선택 받은 것이다. 고로 야권의 승리를 단순히 의석을 많이 받았다 하여 민주당의 승리인 냥 호도 하는 것은 역풍의 지름길이다. 유권자들이 얼마나 합리적 선택을 하는지 보았고 이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임을 본 이상 이런 오만함은 자멸의 지름길이 아닌가 싶다.

 

4. 호남은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당이 석권 했다. 물론 그렇다고 국민의 당이 더민주를 압도했다고 보긴 힘들어 같다. 더민주의 선전 덕분에 전주 을의 경우 기묘한 황금 분할의 결과 정운천 전 농림부 장관이 어부지리로 당선되었고, 순천의 이정현도 만약 양당이 단일화 되었다면 승리를 담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호남의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는 지난 겨울부터 일부 논자들을 중심으로 전개 된 영남패권주의 논쟁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논쟁이 안철수의 국민의 당의 호남 공략이라는 맥락과 맞닿아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즉 영남패권주의는 그것이 내적으로 한국 정치의 영남 독식을 이야기하기만 논의의 실제와 맥락은 호남의 세속화를 통한 동원 전략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호남을 한국 민주주의 보루와 같이 여겼다. 이는 광주의 5월이라는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며 동시에 김대중이라는 위대한 민주화 지도자에 대한 호남의 강렬한 지지의 소산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실체가 분명치 않은 하나의 관념이란 것이다.

사실 호남의 토호들의 행태는 영남의 촌락 지역에서 벌어지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과거 열린우리당 당시 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이들 상당수가 당시 호남 지역 의원들이었고 또 이들 상당수가 지금 새누리당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즉 호남의 투표 행태는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이지만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호남은 사실 영남과 다르지 않은 곳이다.

영남패권주의는 또 다른 호남 소외론이다. 동시에 호남에 대한 발전주의의 소구이며, 풍요에 대한 요구다. 이는 결국 호남의 투표 행태를 세속화 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호남의 유권자여 그대들이 따라야 할 대상은 민주주의로 위장된 저 영남과 수도권 떨거지가 아니라 너희들의 이익에 좌우되는 이들이다!...

 

난 이런 호남의 선택을 존중 받아야 한다 생각한다.5월 정신이라 하지만 솔직히 5월 광주의 그 전민항쟁과 연대의 정신은 과연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 있는가? 아니다. 박제되고 전시되어 운동성과 생명체의 에너지를 잃었다. 김대중이란 상징적 지도자도 떠났고 호남을 민주당에 묶어 둘 이유는 점점 약해져간다. 이런 시점에서 호남의 합리적 선택은 위와 같은 내용을 소구하는 국민의당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5. 서울 제국주의와 지방 식민지. 분열된 투표 행태

 

사람들은 민주당을 호남 정당이라 말하지만 사실 열린우리당 이후 민주당은 호남+수도권 연합 정당이다. 호남은 어느 샌가 부터 당의 지도력을 상실하였고, 당은 수도권과 충청, 영남일부의 진보파와 호남의 보수파로 나뉘는 듯 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국민의 당의 등장은 호남 하거로 이어졌고 이제 민주당은 수도권과 호서의 패자이며 영남 일부를 획득한 정당이 되었다. 이는 어떤 의미로 진보적 수도권 제국주의와 보수적 지방 식민지로 정치 구도의 변화가 나타날 징조일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그나마) 괜찮고 거대한 지방을 인적, 물적 수탈의 대상으로 집적화 되어 가는 수도권은 전국 수준에서 진보층을 형성하여 영남의 조직 노동운동과 야권 성향 유권자와 연대하는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영호남 다수는 내핍된 지방으로 보수화 될 가능성이 크다.

난 그동안 한국의 지역주의가 물적 토대를 온전히 갖고 있지 않은 허위의 균열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에 실존 하는 지역균열은 수도권과 지방의 균열이고 대립이다. 하지만 제도 정치에 투영 되는 지역 균열은 영호남의 균열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당이 호남 할거에 성공하며 이 구도의 변화 징조가 보인다. 앞 절의 호남의 세속화와 더불어 길항 작용을 일으킨다면 앞으로 수도권 진보적 제국주의와 지방의 보수적 식민지 구도가 형성 되지 않을까 조심하게 진단해본다.

 

투 비 컨티뉴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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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누가 흙수저인가?

 

 

지난해 한국 사회를 풍미한 어휘를 몇 개 뽑아 보자면 흙수저는 단연코 그 윗자리 어딘가를 점할 것이다.나날이 악화되는 청년 세대의 삶의 조건과 개선 될 가능성이 희박해 지는 미래 전망, 불평등하고 왜곡된 기회 구조 속에서 부모 세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자원이 후속 세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는데 대한 자조섞인 메시지가 담긴 이 말은 한동안 잠잠했던 청년 세대 담론에 다시 활기를 불어 넣었다.

선거란 그것의 내적 생리 상 어쩔수 없이 그 당시의 가장 뜨거운 감자를 다룬다. 2012년 대두된 이른바 청년 정치는 4년의 시간이 지나 흙수저라는 이미지와 결합하였고, 어느새 흙수저는 청년 정치인들에게 자신이 후보가 되어야 하는 중요한 정당성으로 자리 잡았다. 보수 야당의 청년 경선에서 여러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의 궁핍을 뽐냈으니 이 흙수저 경쟁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 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흙수저라는 이미지, 참 묘한 이미지다. 뭐랄까 흙수저는 시간을 거쳐 의미와 개념이 명료해지도록 주변이 탈각되거나, 입론을 거쳐 그 실체와 의미를 가진 개념을 내포한 이미지라기 보다는 그 실체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이미지다. 이 말은 즉 흙수저라는 말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심지어 자의적으로 활용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실제 스스로 흙수저이며 그들의 대표라 자처했던 이들의 재산이 드러나자 곧장 당신이 흙수저 맞느냐?’는 물음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논박 속에서 그들이 정당성을 소구하고 정립해나가는 과정은 진짜 흙수저에 대한 논쟁으로 바뀌었다.

정치적 과정에서 대중이 일상적으로 접하기 쉬운 말, 익숙한 말을 쓰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유행한다는 이유로 불명확한 말에 편승해 스스로를 정당화 하는 일은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얄팍한 이미지에 기대는 것이 되고 그 얄팍함은 언제든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실 이런 불분명한 이미지와 수사는 늘 문제였다. 이는 사실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말을 매개로 하는 정치체제이고, 인민에 대표받은 데마고그들이 주도하는 체제이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수사 의존 자체를 탓하긴 쉽지 않다. 문제는 얄팍 할 수 있는 이미지와 수사에 의미와 내용을 부여하는 과정이고 이를 자신의 정치인으로 존재 정당성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의 문제다.

한때 정당 활동을 함께했던 친구가 주요 정당 비례대표 후보들의 평균 재산을 올렸다. 아마 이유는 자명할 것이다. 그들의 적은 재산이 그들의 정당성을 방증한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적은 재산이 그들이 흙수저인 듯 보이게 하고 이는 흙수저 당을 자칭하는 자당에게 좋은 정당화 도구가 될 수 있기에 그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흙수저 정치인 논쟁의 핵심은 누가 순수 흙수저냐?”에 있지 않다. 흙수저라는 사회적인 현상을 자신과 일치시키려는 무리한 혹은 다소 자기 존재와 부합하지 않는 옷을 입으려 한 것이 문제인 것이며, 개인의 재산(상속과 증여를 포함한)의 다소(多少)와 상관없이 자신이 흙수저로 불리는 청년 세대의 문제 해결에 필요하다는 자기 정당화의 실패다.

개인의 재산의 많고 적음, 사회경제적인 배경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우리가 목도하였듯이 그런 것을 넘어선 이들이 역사에 존재한다. 맑스나 엥겔스가 비교적 괜찮은 삶의 조건과 사회경제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 가장 고통 받는 이들 곁에 있었지만 반대로 한국의 노년층 다수는 그들이 처한 최악의 사회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의 가장 강고한 지지자로 존재한다. 누구나 스스로를 흙수저와 동일시 했던 이들의 실상과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황당함과 허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진짜 흙수저는 누구냐?” 만큼이나 그들의 비교적 유복한 사회경제적 배경과 삶의 조건에도 어떤 대표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청년 정치에 임하는 지여야 하지 않을까?

지난 제 19대 총선 당시 본격화된 청년 정치는 이제 새로운 변곡점과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 청년 정치란 것이 주요 정당에서 일정정도 제도화 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내용과 실체는 여전히 부실하며, 정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청년 정치인들이 정치를 통해 살수록 있게끔 하는 장치들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와중에 청년 정치인들이 취약한 수사와 이미지가 아니라 좀 더 분명하고 탄탄한 개인의 서사와 정치적 전망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고 대표성을 소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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