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그 섬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 있다.

여교사 윤간이 발생한 섬에 대한 폭격이 화끈하다. 한국에 정의의 사도가 이리도 많은데 이 땅은 왜이리 헬 조선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언론은 사건이 발생한 섬에 대해 맹렬한 공습을 이어간다. 온갖 자극적인 이야기가 쏟아지는 개중에는 가해자들을 옹호, 두둔 하는 말들도 있고 피해자에 대한 공격도 담겨 있다.

난리다. 섬은 이전의 몇 가지 기억들과 조응하여 거대한 악의 성전이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모든 문제는 마치 그곳이 '섬'이기에 일어난 문제인냥 치부 된다. 아 그래 이 사건에 섬이란 요소는 중요하다. 육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중요한 변수다.

그런데 우리가 그 섬을 때리는 여러 이유들이 과연 그 섬 만의 문제 일까? 그곳이 섬이었기에 이런 일이 셍겼을까?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공격한다고 비판하지만 이건 비단 섬이 아니라 우리 일상 곳곳에 산재 되어 있는 전형적인 피해자 인식이고, 여전히 전통적인 대면 사회, 향촌 사회의 '전통'이 작동하고 있는 것인데...

관계가 윤리에 선행하는 것, 혹은 그 관계의 룰이 윤리를 대체 하는 일은 흔하게 목도 된다. 저 멀리 조폭까지 안가더라도 친구니까 봐주는 것들 흔해 빠진 일들이다. 당장 내 남자 형제가, 친구가 이번 '섬'에서 터진 유형의 사건의 가해자일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해자인 자신의 친지들을 비판하고 공박할까? 감히 추측컨데 1할은 분노하고 3할은 수치스러워 하고 나머지는 대개 :그년이 꼬리 쳤지, 그년이 술에 취했지, 그년이 몸 간수를 못했지, 우리 XX는 죄가 없다"로 가해자를 옹호할 것이다. 그 섬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말들은 그 '섬'의 고유한 정서와 관계의 산물이 일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흔해 빠진 피해자 인식, 가해자 인식 아니었던가.

때려야 할 대상은 사실 섬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인데. 우리는 그냥 우리의 흔해 빠진 일부를 때림으로써 우리의 도덕감을 증명하고 싶은건 아닐까. 한편 우리가 농어촌이나 섬, 산골 등 우리이지만 단절되고 소외되고 고립되어 타지화 되는 공감들을 우리가 발 딛는 이곳과 다른 어떤 음모와 판타지가 가득차고 주술적이고 미신적이며 동시에 특이하고 비정상적인 곳으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번 '섬'에 대한 사회적 공습은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

사실 스스로에 대한 성찰 없이 우리 안의 단절된 일부를 공격하는 것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다. 이건 거의 도덕을 팔아 정치적 자위행위로 밖에 귀결 되지 않는다. 이는 결국 그래서 섬에 여성 교원 안보내겠다는 교육부의 멍청함과 별 다르지 않다.

우리의 도덕감을 위해 그 섬을 때리지 말자. 우리의 분노와 도덕이 겨냥해야 하는 대상은 한낱 섬에 있지 않다. 그것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강남역과 구의역, 그리고 (영대신문 1626호 16. 6. 7 발행)

 



대구 중앙로역 2번 출구




  불과 2주 사이를 두고 서울 2호선의 두 역이 거대한 추모와 공론의 장이 되었다. 지난 517일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혐오범죄에 이제 23살 여성이 피살된 데 이어 이번에는 이제 20살을 갓 지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지하철 스크린 도어 보수 과정에서 지하철과 스크린 도어 사이에서 목숨을 잃었다. 잠실 철교를 가운데 두고 몇 정거장 되지 않는 역 사이는 애도와 공감,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로 가득찼고, 두 역사는 어느새 추모와 애도의 언명이 적힌 포스트잇과 조화들에게 그 여백을 내어 주었다.


  강남역과 구의역 두 사건은 일견 전혀 다른 개별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나는 여성에 대한 혐오에 의한 살인 사건이며, 하나는 지하철 안전시설 보수과정에 생긴 산업재해이니 그것이 서울 2호선 선상에 일어난 사건이란 것을 제외하곤 유사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많은 유사점과 공유 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접점의 복판에 우리가 인지하지 않은 구조와 권력의 문제, 위험과 불안, 폭력의 문제가 놓여있다. 강남역과 구의역의 두 사건은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통해 우리의 시선 바깥에 있던 이 현실을 우리의 인지 체계 내에 기입되게 한 사건이기도 하다.


  지난 517일에 있었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은 여성 혐오라는 층위와 직간접적으로 상관없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폭력이라는 층위가 결합되어 나타난 비극이었다. 우리는 이를 여성혐오라는 새로운 범주의 수용을 통해 설명하고 그 내의 구조적이고 권력적 속성을 포착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접근의 역사에 비해 여성이라는 약자에 대한 폭력의 역사는 비근한 역사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도구화를 포함하는 이 폭력의 역사가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하기에 여성들은 강남역에서 있었던 사건을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처럼 느끼게 되었고, 그녀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성적 폭력과 대상화의 경험은 서로간의 공감과 연대의 공간을 여는 매개가 되었다. ‘자신이 될 수 있었다는 구호는 바로 타인과 나의 개별적일 경험을 보편화하고 있다. 구호가 보여주는 그 지점이 있었기에 단지 흔한 사회면 단신 기사로 사라질 법 했던 사건은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연대와 추모의 행렬로 이어졌다.


  구의역 사건은 어떠하였는가? 그것은 효율과 비용 절감 논리 속에서 이뤄진 하청과 외주가 낳은 비극이었다. 한국은 공공부문부터 민간부문에 걸쳐 광범위한 부문에서 거칠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에 대한 외주화와 하청화가 만연해있다. 사실 하나의 산재로 구의역 사건 같은 일은 너무나도 비일비재하다. 울산이나 거제와 같은 곳에서 노동과정에서 낙사나 압사는 일상적인 죽음이며 대구나 창원 같은 부품공업이 활발한 곳에서 선반이나 금형 작업 과정 중에 절단된 손가락이 과연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라. 단지 이 죽음과 신체 절단의 구조가 우리의 정제된 삶바깥에 있었기에 쉽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구의역 사건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그 죽음 자체가 가진 비극성 보다는 죽은 노동자의 갓 스무 살이 되었다는 나이와 가방 속의 컵라면이라는 서사의 힘이 컸다. 이미 서울 곳곳에서 유사한 비극이 있었지만 그것은 한 줄 보도로 휘발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컵라면과 나이의 서사는 많은 이들이 구의역 사건에 심적으로 개입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비록 컵라면과 스무 살의 서사가 위험과 불안의 외주화, 하청화라는 구의역 사건의 본질을 압도하였지만 이 서사라도 있었기에 사람들은 생활공간 이면에서 일어나는 이 죽음과 절단의 구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죽었다. 살아 있는 얼굴과 꿈을 지닌 인간이 죽었다. 누군가에겐 여성으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로 대상화 되고 타자화 되었지만 우리와 다르지 않은 뼈와 살에 온기가 있는 인간이 죽었다. 서로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죽은 두 사람의 죽음이 나와 상관없는 남의 죽음이라면 그것은 단지 짧은 비애감, 연민과 함께 마멸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나와 다르지 않은 이의 죽음이라면 그것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의 고통이, 누군가의 경험이 나에게 들어온 순간 애도와 추모, 절규와 비극은 연대와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그것이 바로 영문도 모른 채 화장실에 쓰러져 죽어간, 지하철과 스크린도어 사이에서 죽어간 이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윤리이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에 응답하고 그것이 마치 나의 경험인 듯이 반추하고 상상하는 과정은 우리를 정치화 시킨다.


  여성이기에, 비정규 하청 노동자이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소수자이기에, 약자이기에 겪어야 하는 불안과 공포, 죽음의 사슬을 끊어내어야 한다. 정치는 누군가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 고통과 기억에 대해 연대하고 공감하고 함께 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추모와 애도를 넘어서는 약자에게 불안과 공포를 전가하는 구조를 넘어서는 응답과 연대의 정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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