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한 이미지, 낡은 축제(영대신문 1605호2014년 10월 1일 발행)


 

  지금 대구 문화예술회관과 예술발전소에는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한 대구사진비에날레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 문화예술 회관의 주전시관에는 매우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다. ‘기원 기억 패러디를 주제로 열린 이 주전시의 구성작품들은 그간 우리가 가져온 사진 세계를 짓뭉개버린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방법적 전위성이다. 많은 작품들이 회화와 비디오아트, 설치미술, 사진이라는 작품 형태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기본이며, 사진의 전통적 문법조차 변주되고 해체하고 있었다. 사실 모두가 사진사인 이 시대에 직업사진 예술사진으로 사진의 의미에 대해 많은 물음이 제기되고 있고, 이번 비엔날레는 그에 대한 모색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비엔날레를 다녀오기 며칠 전, 다소 놀라운 사진을 몇 장 보게 되었다. 그것들은 9월에 열린 대동제 기간 자과 주막을 홍보하기 위해 몇몇 학과 학생들이 만든 포스터였다. 상이한 과 학생회에서 만들어진 포스터들은 놀랍도록 서로 닮아 있었다. 이것은 학과 전공의 공통성이나 주막 컨셉의 공통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여성의 몸을 포스터의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이다. 단순히 몸과 섹슈얼리티를 포스터의 이미지로 사용한 것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인간의 몸이 그 자체로 보여주는 미학이 존재하기도 하며 몸이 하나의 메시지나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그리고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때때로 권위적이고 억압저인 사회 문화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포스터들은 모두 대상화된 여성의 몸을 중요한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 포스터들에는 어떤 성적 환상을 자극하는 페티시즘이 투영되기도 하고, 여성의 특정한 신체 부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상당히 자극적인 문구로 자신들의 과 주막으로 오길 권고한다. 물론 노골적인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포스터의 이미지는 대구 도심의 유흥가 홍보 전단지의 맥락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이미지가 대학 축제 전반에 걸쳐 이슈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숙명여대에서 제시된 축제 기간 의복 규정이 뜨거운 감자였다. 이 규정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억압적이냐의 여부와 별개로 규정의 존재 자체는 축제에서 섹슈얼리티와 몸이 하나의 도구로 대상화된 것이 비단 이번 포스터를 만든 몇몇 학과만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의 문화적 해방구로 대학 축제를 바라봤던 전통적 이미지와 포스터가 드러내는 현재 대학 축제 사이에서 혼란과 고민이 생기는 지점이다.


  대구 사진 비엔날레에 전시된 사진들과 학과들의 축제 포스터는 유사한 문제적 현실에서 출발한다. 대구 사진 비엔날레는 주제적으론 사회적 기억이나 탈 식민주의적 담론, 전쟁과 여성을 이야기 하지만 주전시장의 사진들은 모두가 사진가가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사진이 지닌 고유성, 예술성과 의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비엔날레의 많은 사진들은 직업적인 작가들의 예술이란 이름하에 제시되는 난해하고 복잡한 기법, 현학적 주제에 머무르거나 지나치게 단순한 작품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양한 방법과 문법으로 보는 이에게 생각 하는 즐거움, 사진을 읽는 즐거움을 던지는 사진들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대학 축제 포스터가 보여주는 전망은 사진비엔날레의 그것과 대조된다. 대학 축제의 문제는 지난 칼럼에서 상술한바와 같이 대학 정체성과 대학 문화의 위기로부터 연유한다. 그리고 그 위기의 한 지점에 고교 졸업자의 절대 다수가 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이 있다. 진학 인구의 대폭적 증가는 대학 문화와 사회의 지배적 문화의 경계를 희석시켰고, 점차 사회의 지배적 문화가 대학 문화를 잠식했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행과 권위주의의 약화, 대학생 저변의 확대는 자연스럽게 대학 축제가 발생적으로 갖고 있던 문화적 해방구의 성격을 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축제의 의미가 약해졌다고 하여 축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이러한 경향의 지속은 의미 자체가 휘발되어 버린 채 주막이라는 형식만 남은 지금의 축제로 이어졌다. 이제 학생들에게 축제는 그저 1년에 3일 유별나게 즐기는 날, 학교 안에서 술 먹는 날이지 하나의 문화적 해방구가 아니다. 그런 와중에 주막과 축제의 의미 보단 흥행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포스터들은 의미가 사라져버린 채 생명력을 이어가는 낡은 축제를 상징한다. 많은 이들이 축제에 대해 회의할지라도 축제의 새로운 양식은 공적인 논의 무대에 올라오지 않는다. 사진이 스스로의 존재 의미와 양식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변주하고 해체하는 동안 축제는 후배들의 몸을 성적으로 대상화 하면서 까지 머무른 채, 단순한 유희와 흥행의 잣대로만 사유된다. 이에 대한 공적인 물음과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 축제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치맥페스티벌과 사라진 ‘대학’의 이념(영대신문 1604호 2014.9.15 발행)

 

대학 언론, 대학 운동 등 대학 내의 여러 활동과 행사에는 유독 ‘대학’이라는 말이 붙는다. 여기서 대학이란 말의 외연은 단순히 대학이란 공간,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지칭이며 그 내포에는 ‘대학’이 대학 외부와 어떠한 지점에서 구분되는 특성이 있다는 함의가 담겨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대학에서 이뤄지는 여러 활동들에서 이런 ‘대학’의 고유성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하게는 대학이 이미 대학 바깥 사회와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이 변화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더 이상 이전 세대와 같이 하나의 사회적 정체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는 90%를 넘나드는 대학진학률에 따라 절대적으로 대학생의 규모가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대학생들 사이의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의 분화가 두드러진 영향이 크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이전 세대와 같은 공통의 목표와 거대담론이 사라짐에 따라 그런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의 상이함에도 서로가 공통성을 느낄 토대 역시 사라졌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뤄지는 활동들에는 여전히 ‘대학’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여기서 대학은 그 말의 내포에 담긴 구분되는 정체성을 뜻하기 보단 단지 공간과 거점만을 의미하거나 그저 하나의 수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이것이 ‘대학’이라는 배경에 부합하는지 자문자답하게 하는 일 역시 종종 목격하게 된다.

추석 직전, 정문 수변무대 인근에는 화려한 무대와 천막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천막들엔 하나 같이 익숙한 이름의 주류, 치킨, 식품회사들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치맥페스티벌>이 두 번째로 본교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해가 저물고 학생과 시민들이 부스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치킨과 맥주를 준비하여 잔디밭에 모여 앉아 공연을 관람하며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치킨과 맥주를 팔 뿐, 그저 평소 대학 축제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 모습이 대학 캠퍼스가 아닌 다른 여타의 공간에 고스란히 옮겨 놓아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즉 굳이 대학 캠퍼스에서 대학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행사인 것이다.

‘대학’의 정체성은 대학의 문화를 통해 발현된다. 그렇기에 대학의 문화를 살펴서 외부와 구분되는 공간으로 이해되는 ‘대학’의 고유성, 정체성을 반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학 사회에서 대학 문화라는 것을 찾는 일은 녹록치 않다. 현재의 대학 문화는 크게 두 가지 형식에 잠식되고 있다. 하나는 과거 198,90년대 대학에 형성된 운동권 하위문화의 잔재물들이다. 이 당시 운동권 하위문화는 대학이란 공간을 외부와 구분케 하는 가장 큰 요소였다. 저항과 해방의 거대담론 아래 기획되고 구성된 이 문화 양식은 대학에 다양한 형태의 의식과 행사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통적 운동권이 퇴조한 이후 대학에 잔존한 이 의식과 행사들은 과거 그것을 기획하던 당시의 의미와 정신을 잃고 새롭게 되물어지고, 재해석되지 않은 채 껍데기만 남아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치맥페스티벌>처럼 대학 외부 문화의 연장선상으로 소비주의, 상업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닌 문화가 대학 문화를 침식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형식 모두 온전히 ‘대학’의 문화라고 지칭하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왜냐? 그곳에는 바로 ‘대학’의 정체성과 이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바깥과 구분 되는 ‘대학’이기 위해서는 그 구분을 가능케 하는 어떤 기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대학’의 정체성과 이념이다. 중세 인문주의자들이 만든 이래 대학이란 공간은 늘 다른 공간이었다. 당시 인민주의자들은 진리의 해석권을 신과 교회에서 인간으로 가져오고자 했고, 이는 신과 종교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의미했다. 공학의 시작은 이윤창출이 아닌 노동으로 부터의 인간 해방이었다. 즉 ‘대학’이 단순한 학교가 아닌 이유는 그 근원에 학습과 진리탐구를 통한 인간 해방의 지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학에는 그 바깥과 구분되는 정체성, 문화와 정서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에서 과연 ‘대학’의 이념과 정체성이 있는가?

지난 학기, 중앙대 철학과 학생 한명이 대학을 자퇴했다. 그는 대학이 ‘대학’답지 않은 취업학원으로 전락했으며, ‘대학’이 정의를 잃었음을 비판했다. 현재의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지금 대학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국비지원금 경쟁, 취업률 경쟁, 학벌경쟁이 남아있다. 학교의 입구엔 휘황찬란한 국비지원금 유치 성과가 광고되고, 기업의 임원을 얼마 배출했는지가 적혀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으려 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대학’의 이념과 정체성이 사리진 그 순간 이곳은 그 자퇴생의 말처럼 전문대학 아니 학원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사실 답습되는 대학 문화나 <치맥페스티벌>의 문제는 결국 대학에서 ‘대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좋은 ‘대학’의 가능성, ‘대학’의 이념을 찾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이들의 ‘말’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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