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누구의 것인가?(영대신문 1613호)


이시훈(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본색소사이어티 대표)


 

#1. 한 명의 대학원생이 책상을 떠나 학교 캠퍼스의 높은 탑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보름이 넘은 지금도 그 탑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그의 요구는 간명했다. 총장 선임 과정에서 빚어진 종단의 개입을 막고 파행적인 총장 인사를 바로 잡아, 대학 민주화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위시한 구성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의 총장 선임은 파행 끝에 논문 표절 등 논란을 빚은 인사의 임명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2. 대학 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학생과 교원들의 노력이 오랜 시간 이어진 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이 학교의 재단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속했고, 이사장은 그 기업 오너로 재계뿐만 아니라 체육계 등 사회 전반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대학 이사장이 되기 이전 대한상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대학이 교육과 학문의 장이라는 전통적 관념을 낡은 헛소리라 치부하며 대학에게 이제 직업교육소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발언으로 큰 충격을 줬던 인물이다. 그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교수들을 향해 비상식적인 언사와 표현으로 대응 의지를 밝혔고, 결국 그로 인해 대학과 기업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3. 총장 없이 운영되는 학교가 있다. 총장을 대체하는 제도가 존재하여 총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대학의 구성원들은 총장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중이다. 소송도 해보고, 총장 후보도 바꿔 보고, 시위와 기자회견 등 여러 형태의 항의도 해보지만 텅빈 총장실의 의자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중, 현 정권에 친화적인 인물로 분류되는 전직 국회의원이 후보로 추천되어 마침내 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 대학들은 여전히 총장 없이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위의 세 사례는 대학이 재단(소유관계), 자본,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 장면은 자연스레 대학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끔 한다.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대학을 법적으로 소유한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대학을 일군 것은 교원과 연구자, 교직원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대학을 지탱해온 학생들이다. 하지만 대학 내에서 이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본래의 목적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치들 역시 위협 받고 있다.


  대학 구성원들의 입지를 지탱해온 큰 힘은 바로 대학의 정신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크게 독립성과 공공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독립성은 학문과 연구의 자유, 비판과 지성의 자유, 말과 표현의 자유 등으로 권력, 자본 등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세계를 다루는 대학이 특정한 사적 집단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그것을 연구하고 말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공성은 대학의 바로 그런 역능을 지지하는 원리다. 우리는 대개 대학을 그 자체로 사유하지만 실제 대학은 물질로서의 대학과 활동으로서의 대학이라는 두 층위로 이뤄져있다. 이 중 활동으로서의 대학은 그것을 구성하는 원리가 사회적인 동시에 역사적이다. 즉 활동으로서의 대학은 교원, 연구자, 학생들의 노력의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지원 그리고 역사적 축적의 산물이기에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대학이 생산해낸 지식 대부분은 사회화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공공성은 이처럼 누군가에 의해 그 활동의 과정과 결과가 사적으로 전유되지 않도록 보호한다.


  하지만 이런 대학의 정신은 우려스러울 정도로 위협받고 있다. 학원 민주화의 대표적 유산인 총장직선제는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어 갔다. 한편 참여정부 시절 단행된 사학법 개정은 사실상 좌초되었고,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구성원들의 의견을 지지하기보다는 과거 학원 민주화 과정에서 축출된 재단들을 복귀시키며 대학의 정신을 침해했다. 거기에 더해 자본과 대학의 협력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자본의 입장이 대학에 투영되는 경우 역시 잦아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국내 굴지 기업들의 직접적인 영향에 놓인 대학들이 상당수 있으며, 협력이란 미명 하에 자본의 영향력에 놓인 대학들 역시 존재한다. 심지어 국가는 양적 지표 중심의 구조조정을 혁신이라 부르며 중앙대식의 구조조정 모델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으며, 경북대와 공주대, 방통대 등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인사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대학이 이와 같이 외부 요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 속에서 대학다움을 얼마나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렇지 않아도 양화된 실적 중심으로 흘러가는 대학 제도 속에서 대학의 정신마저 위협 받을 때 다시금 대학다움이 무엇인지 되물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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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뉴스 



대학본부와 탈정치라는 허위

 

이시훈(본색 소사이어티, 영남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



  우리가 정치를 사고할 때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가, 정치를 정부나 국가, 직업 정치인, 정당, 국회 등에 국한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일련의 행동들이 그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면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정치사회라는 온전히 구분되고 제한된 공간에서만 이뤄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다. 좁은 의미로 정치는 제도화된 정치사회에서 작동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널은 의미의 정치는 사실 우리 생활 저변 곳곳에 존재하고 작동한다. 선배와 후배, 선생과 학생,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나이든 이 등 너와 나 사이 그리고 사회를 가르는 수많은 분할선 만큼이나 정치는 산재해 있다.

  대학 역시 정치적 공간이다. 대학은 그 발생이 지성과 이성을 통해 교회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문주의적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근대에 들어 대학은 국민국가의 엘리트를 충원하는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대학은 좋은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러한 더 나은 국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은 대학생, 지식인 집단이 근현대의 수많은 혁명과 저항에 앞장서게 한 중요한 뿌리였다. 대학 발생의 뿌리인 인문학과 근대 국민국가에서 대학의 중요한 역할이던 사회과학은 그것이 다루는 주제 상 자연히 세계와 역사, 정치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접어두고 간단히 생각해보더라도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사람이 모여 있고, 짧게는 20년 이상 서로 다른 삶을 살던 이들이 모여 있는 이 공간에서 상이한 세계관과 정치, 사회, 문화적 의식과 행동이 분출되고 충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대학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공간이다.

  최근 성균관대학교는 세월호 유가족과 학생의 간담회를 추진한 학생들에게 학교 시설 사용을 불허했다. 그리고 이런 학교 측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간담회를 강행한 단대 학생회장에게 장학금 지급 중지라는 매우 강한 징계를 내렸다. 지난해 대구 지역 5.18 광주항쟁 유관단체들이 주최한 5.18 관련 강연회를 행사 직전에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강의실 사용을 거부했던 대구교육대학은 최근 학생들이 주최한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 대해서도 강의실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간담회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열악한 동아리방에서 열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 사건에서 대학 본부는 모두 놀랍도록 똑같은 이유를 들었다. 그것이 정치적 행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와 유사한 일이 본교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1030일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노란버스를 알리는 현수막을 교내에 부착하려한 학생에게 본부의 소관 부서에서 부착 불허를 통보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해당 부서의 팀장은 이 학생에게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 활동을 사이비 종교에 빗대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는 현수막 부착을 허가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오마이뉴스는 보도 했다.

  많은 이들이 대학에 대해 사고할 때 대학의 주체, 중요한 동력은 학생과 교수, 연구자들이이었다. 자연히 대학 본부와 교직원의 존재는 다소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모두 대학 본부의 적극적인 규제에 의해 일어난 이들이다.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왜 그들은 정치적인 것을 규제하려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 부서와 교직원들에게 정치적인 것을 판단하고 규제할 권리를 주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판단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설사 그것이 정치적이라 하더라도 대학 본부가 그것을 규제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자문해 봐야한다. 대학에서의 정치적 표현과 활동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면 대학 본부의 역할은 오히려 그런 정치적 표현과 활동들이 다원적으로 공존하고,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정치를 더럽고 부도덕하다고 기피한다. 그러면서 대학에 대해 대학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사실 반은 옳고 반은 틀린 말이다. 대학이 정치에 대해 가져야 하는 자유로움은 비평과 비판의 자유로움이며, 대학 운영이 정치적 파당의 이해관계나 입장에 매몰되거나 좌지우지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정치적 객관성이란 단순한 무당파성이 아니라 분석과 진단, 설명의 엄밀함과 객관성을 뜻한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 본부들은 이 자유와 객관성의 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이 오도된 논리로 구성원들의 정치적 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또한 대학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 그 잣대의 일관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최근 몇 해간 학교와 총학생회가 주최한 정치적 인사들의 강연회에 적용된 기준과 학생 개인의 자율적 활동에 적용되는 잣대가 다르다면, 그 누가 이 잣대를 객관적이고 정의롭다 여기겠는가? 부디 대학 본부가 이러한 왜곡된 틀부터 탈피하여, 학내에 다양한 정치적 의견과 활동이 백가 쟁명할 수 있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대를 열기를 바란다.

치맥페스티벌과 사라진 ‘대학’의 이념(영대신문 1604호 2014.9.15 발행)

 

대학 언론, 대학 운동 등 대학 내의 여러 활동과 행사에는 유독 ‘대학’이라는 말이 붙는다. 여기서 대학이란 말의 외연은 단순히 대학이란 공간,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지칭이며 그 내포에는 ‘대학’이 대학 외부와 어떠한 지점에서 구분되는 특성이 있다는 함의가 담겨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대학에서 이뤄지는 여러 활동들에서 이런 ‘대학’의 고유성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하게는 대학이 이미 대학 바깥 사회와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이 변화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더 이상 이전 세대와 같이 하나의 사회적 정체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는 90%를 넘나드는 대학진학률에 따라 절대적으로 대학생의 규모가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대학생들 사이의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의 분화가 두드러진 영향이 크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이전 세대와 같은 공통의 목표와 거대담론이 사라짐에 따라 그런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의 상이함에도 서로가 공통성을 느낄 토대 역시 사라졌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뤄지는 활동들에는 여전히 ‘대학’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여기서 대학은 그 말의 내포에 담긴 구분되는 정체성을 뜻하기 보단 단지 공간과 거점만을 의미하거나 그저 하나의 수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이것이 ‘대학’이라는 배경에 부합하는지 자문자답하게 하는 일 역시 종종 목격하게 된다.

추석 직전, 정문 수변무대 인근에는 화려한 무대와 천막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천막들엔 하나 같이 익숙한 이름의 주류, 치킨, 식품회사들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치맥페스티벌>이 두 번째로 본교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해가 저물고 학생과 시민들이 부스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치킨과 맥주를 준비하여 잔디밭에 모여 앉아 공연을 관람하며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치킨과 맥주를 팔 뿐, 그저 평소 대학 축제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 모습이 대학 캠퍼스가 아닌 다른 여타의 공간에 고스란히 옮겨 놓아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즉 굳이 대학 캠퍼스에서 대학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행사인 것이다.

‘대학’의 정체성은 대학의 문화를 통해 발현된다. 그렇기에 대학의 문화를 살펴서 외부와 구분되는 공간으로 이해되는 ‘대학’의 고유성, 정체성을 반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학 사회에서 대학 문화라는 것을 찾는 일은 녹록치 않다. 현재의 대학 문화는 크게 두 가지 형식에 잠식되고 있다. 하나는 과거 198,90년대 대학에 형성된 운동권 하위문화의 잔재물들이다. 이 당시 운동권 하위문화는 대학이란 공간을 외부와 구분케 하는 가장 큰 요소였다. 저항과 해방의 거대담론 아래 기획되고 구성된 이 문화 양식은 대학에 다양한 형태의 의식과 행사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통적 운동권이 퇴조한 이후 대학에 잔존한 이 의식과 행사들은 과거 그것을 기획하던 당시의 의미와 정신을 잃고 새롭게 되물어지고, 재해석되지 않은 채 껍데기만 남아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치맥페스티벌>처럼 대학 외부 문화의 연장선상으로 소비주의, 상업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닌 문화가 대학 문화를 침식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형식 모두 온전히 ‘대학’의 문화라고 지칭하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왜냐? 그곳에는 바로 ‘대학’의 정체성과 이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바깥과 구분 되는 ‘대학’이기 위해서는 그 구분을 가능케 하는 어떤 기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대학’의 정체성과 이념이다. 중세 인문주의자들이 만든 이래 대학이란 공간은 늘 다른 공간이었다. 당시 인민주의자들은 진리의 해석권을 신과 교회에서 인간으로 가져오고자 했고, 이는 신과 종교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의미했다. 공학의 시작은 이윤창출이 아닌 노동으로 부터의 인간 해방이었다. 즉 ‘대학’이 단순한 학교가 아닌 이유는 그 근원에 학습과 진리탐구를 통한 인간 해방의 지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학에는 그 바깥과 구분되는 정체성, 문화와 정서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에서 과연 ‘대학’의 이념과 정체성이 있는가?

지난 학기, 중앙대 철학과 학생 한명이 대학을 자퇴했다. 그는 대학이 ‘대학’답지 않은 취업학원으로 전락했으며, ‘대학’이 정의를 잃었음을 비판했다. 현재의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지금 대학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국비지원금 경쟁, 취업률 경쟁, 학벌경쟁이 남아있다. 학교의 입구엔 휘황찬란한 국비지원금 유치 성과가 광고되고, 기업의 임원을 얼마 배출했는지가 적혀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으려 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대학’의 이념과 정체성이 사리진 그 순간 이곳은 그 자퇴생의 말처럼 전문대학 아니 학원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사실 답습되는 대학 문화나 <치맥페스티벌>의 문제는 결국 대학에서 ‘대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좋은 ‘대학’의 가능성, ‘대학’의 이념을 찾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이들의 ‘말’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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