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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존재의 이유 (영대신문 1617호, 2015년 9월 30일 발행)

존재의 이유

(영대신문 1617, 2015930일 발행)

 


 

이시훈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하는 세계는 존재들로 가득한 세계다. 그리고 동시에 세계는 이 존재들이 자기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자기 정립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이다.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존재하는 제도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도 역시 설계되고 구상되는 단계에서부터 어떤 종류의 문제, 현실, 필요로부터 도출되고 다양한 경험과 논리를 통해 그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물론 모든 제도가 내적, 외적 정당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독재나 권위주의, 전체주의의 유산이나 현재의 맥락 내지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망령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역사는 정당성을 상실한 수많은 망령들을 수정하고 폐지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학생회의 존치 문제가 학내에서 화두가 된지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다.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고, 실제로 모 단과대의 경우 대의 절차를 통해 해당 단과대학의 여학생회를 폐지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은 ()여학생회의 폐지를 주장하며 ()여학생회가 사실상 어떤 의미 있는 활동도 하지 않고 있으며 소중한 학생회비로부터 지출되는 예산만 좀먹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한편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로부터 모아진 학생회비에서 여학생들을 대표하는 기구에 예산을 배정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다. 즉 남학생들의 학생회비가 여학생회에 투여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사실 본교만의 특수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미 수도권의 많은 학교에서 ()여학생회가 폐지되고 새로운 대체기구들로 전환되었으며 설사 조직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많은 경우 그것이 사문화되고 형식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존치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의 배경은 대학 사회에서 전통적 의미의 학생운동이 사실상 쇠퇴를 넘어 사멸의 단계에 이르렀고, 전통적 학생운동 내에서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던 여성해방 담론 역시 대학 내에서 여러 현실적 문제로 설 자리를 잃은 데에 기인한다. 이런 과정의 결과로 여학생회는 여학생들의 관심을 나날이 잃어갔으며, 자연히 대학 내 여성운동의 공간이자 여학생들의 자치운동의 성격을 잃은 채 여성용품이나 자궁경부암 예방 주사 접종과 같은 파편적인 복지와 서비스만 제공하는 기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전통적 학생운동 내에서도 다소 주변적인 운동으로 여겨지곤 하던 여학생운동이 최신의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 젠더이론과 소수자 운동의 실천 등으로부터 학습하고 새로운 운동방향을 정립하지 못하면서, 본교의 여학생운동은 그야말로 별 일 없고,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조직이 되어버렸다.

 

이제 곧 학생회 선거 시즌이다. 선거 시즌이 되면 여학생회 문제는 다시 한번 뜨거운 감자가 될 공산이 크다. 우리는 이 시점에 여학생회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선 여학생회의 존재의 이유를 확인해야 한다. 이는 여학생회 폐지론자들도, 여학생회 스스로도 고민하고 토론해야 할 지점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남성 지배 사회이다. 많은 이들이 역차별 내지 여성우위를 이야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엽적이고 개별적인 일부의 현상이지 이 사회의 권력관계 전반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당장 이번 추석에 집에서 전을 부치고 제수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되물어 보아도 한국 사회는 남성 지배적 사회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국의 열악한 분배구조와 사회적인 계층 상승 통로의 봉쇄, 취업의 곤란함과 같은 조건 속에서 여성혐오가 문제가 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온갖 여성혐오의 수사들이 범람하고 있고, 여성을 대상화한 글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지난 축제에서 모 단대의 포스터 역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기도 했다. 한편 대학 내 교수와 학생, 선배와 후배,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계에서도 많은 경우 여성은 약자로 존재하고 있으며 성적 대상화나 희롱의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 떠오르는 이슈인 LGBT, 즉 성소수자 문제 역시 결국은 여학생회의 역할로 고민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여학생회를 페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과 역할이 무엇으로부터 나타났고 그것이 지금의 현실과 배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파악하고, 만약 그 역할과 기능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대학에 여성과 소수자, 인권의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닌 이상 여학생 운동은 어떤 형식으로라도 복원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여학생회를 둘러싼 논의가 그것의 존폐가 아니라 여학생 운동의 의미와 필요 그리고 그것의 복원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고, 이에 부합하는 회칙과 조직 모델에 관한 논의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