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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원래, 그냥, 그렇게, 그곳에(대구신문 9월 20일)

원래, 그냥, 그렇게, 그곳에(대구신문 9월 20일)


이시훈



대개 우리는 생활공간 속에서 수많은 언어들 속에서 살아간다. 언어와 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때로 우리는 언어들이 ‘원래, 그냥, 그렇게, 그곳에’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일상의 우리 생활공간에선 유효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창시절 외국말과 글을 우리말과 글로 옮길 때 종종 ‘적정한 어휘’를 고르는 일로 씨름하거나, 시를 쓰며 그 결과 흐름에 맞으면서 의미에 부합하는 시어에 고뇌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하나의 작은 단어조차도 ‘원래, 그냥, 그렇게, 그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것은 바로 흔히 말하는 언어의 ‘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언어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연과 그것의 실제인 내포가 있는 것이다. 멥쌀과 찹쌀이 그 외형이 유사함에도 쓰이는 목적이 다르듯 언어도 우리가 의식하건 무의식하건 그것의 외연과 내포의 적확함과 필요에 따라 선정되고 배치되고 조작되고 있다.

최근 한국은 노동시장의 개편을 둘러싸고 논의가 뜨겁다. 며칠 전 노사정위원회에서 나온 안이 한국노총 중앙집행위를 통과하며 보수정권 10년간 추진된 일련의 사회 개편에서 노동 부문 개편이 일정정도 마무리 되어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그 외연에 드러나는 것들이다. ‘개혁’, ‘대타협’, ‘청년 고용’, ‘양보’ 등등 수많은 수사들이 이 노동시장 개편의 외연을 장식하고 있다. 사실 방송이나 신문, 인터넷 매체 등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이것이 정말 ‘개혁’이고 진정한 ‘타협’인지에 대해 별생각 없이 수긍하고 수용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모든 언어가 ‘원래, 그냥, 그렇게, 그곳에’ 있지 않다면 그것을 둘러싼 언어들 역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현재 정부는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이나 독일의 하르츠 개혁과 같은 모델을 상정하고 대타협에 기반을 둔 노동시장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과연 얼마나 개혁적이고 대타협에 기반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요컨대 노동계에 대한 선물로 불리는 통상임금 문제는 이미 과거 대법원에서 난 판결을 준수하는 것이며, 노동시간 문제 역시 휴일노동에 관한 과거 대법원 판결을 따르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선물’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을 타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에 비해 개혁안이라고 나온 일반해고 및 취업규칙의 개정 문제는 노동시장에서의 ‘유연’으로 불리는 쉬운 해고를 노조의 보호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약한 계층으로 그 고통과 위협, 불안을 이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한편 임금 피크제 역시 청년고용 확대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근거로 청년층의 고통과 부담을 노후 불안에 내몰린 부모세대로 전가하는 성격이 강하다. 5,60대의 경우 자녀에게 부과된 고액의 대학 등록금, 결혼자금 그리고 본인들의 의료비와 노후 준비와 같이 굵직굵직한 지출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청년고용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것은 상당히 무책임해보이기까지 한다.

개혁과 타협의 외연을 지니고 있지만 그 말의 내포는 지극히 우리 사회에서 취약하고 불안정하며 가장 고통 받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집단에게 고용불안과 쉬운 해고로 대표되는 노동유연성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이고 타협이라는 수사를 붙이려면 최소한 임금피크제로 인해 발생한 기성세대의 수익 결손에 대해 국가가 교육, 의료, 노후에 대한 탈상품화와 같은 지원과 복지가 이뤄져야 하며, 노-자 타협이라 불릴려면 자본이 불법 파견과 같은 악질적인 고용행태를 수정하고 노동3권의 사각지대와 감독관청의 무관심에 숨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노동과 자본의 기운 무게추를 정치가 맞출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협상과 타협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사회적 대타협이고 개혁이라 불리는 말들은 그야 말로 그것의 실상을 은폐하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모든 언어를 선정하고 배치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내포와 진실을 흐리는 언어들이 너무나도 많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세계가 복잡해질수록 우린 점점 섬세한 관찰과 숙의, 공부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기 보단 단지 드러나는 언어들에 기대기 쉬워진다.

하지만 시민의 길이란 끊임없이 묻고 따지고 확인하고 쟁취하는 역사의 연속이다. 정치의 계절을 앞둔 시점, 노동개편 문제를 통해 다시 한 번 시민의 혜안과 숙의의 중요성을 생각해본다.


원본

http://www.idaegu.co.kr/idaegu_mobile/news.php?code=op&mode=view&num=175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