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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육참골단의 공리주의”...FTA와 관련한 아이디어 정리

“육참골단의 공리주의”


  근래 한 후배가 최근 서점가를 휩쓴다는 마이클 센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 한잔을 하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 후배는 대뜸 뜬금없이 커피를 식탁에 올려두고 책의 어느 쪽을 펼쳐보더니 나에게 읽어보라 하였다. 그 책의 내용은 이러한 내용이었다.


 “당신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기관차의 운전수이다. 그런데 갑자기 브레이크가 들지 않는데 앞에는 5명의 선로정비반원들이 서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보니 옆으로 가는 임시철로가 보이고 그곳에는 한 사람의 선로정비원이 서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라면 계속 달려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 가겠는가 임시선로로 돌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겠는 기?”

  이어서는 책은 “이 질문이 어렵다면 상황을 바꿔보자 당신은 저 멀리서 앞에서 말한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 양쪽의 선로정비반원들은 당신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 옆에는 매우 덩치가 큰 남자가 서있고 그를 선로로 밀어서 선로를 막는다면 이 덩치의 희생을 통해 선로정비반원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남자를 밀어 떨어뜨려 그 선로반원들을 구하겠는가?”


 참고로 이 후배는 평소에 사회에 대해 아주 철저히 집단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사고를 해온 친구였다. 과거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문제(그때 이 후배는 고등학생이었다.), 한미 FTA 문제, 쌍용차 사태 그리고 제주도 해군기지 등의 문제에 관해 내가 던지는 문제제기에 대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곤 하였다. 그랬던 이 후배가 자신의 평소의 그 투철함이 극단적으로 수렴된 책의 상황 제시를 읽고 뭔가 느낌을 받았는지 그런 저런 이야길 주고받다가 결국 시험을 끝내고 같이 책을 읽는 소위 ‘집단학습’을 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센덜 교수의 이 논리 구조이다. 한국과 같이 기득권층의 필요에 의해 집단성이 자주 형성되는 사회에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이 폭력적으로 작동한다. 스스로가 ‘소’에 포함되는지 ‘대’에 포함되는지 명백하지 않은 많은 이들이 자신이 ‘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이 논리에 동조하는 경우 역시 허다하다. 하지만 노동계에서 예전부터 돌던 ‘비정규직의 문제는 정규직의 문제이다’라는 이야기처럼 그런 식으로 ‘소’의 희생을 누적시키다 보면 ‘소’와 ‘대’의 경계선에 놓인 잠재적 ‘소’들 스스로가 그 동일한 상황 구조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는 과연 그 스스로를 위해 누가 연대해줄 지는 의문이다.


  한 EU FTA와 한 미 FTA에 찬성하는 다수의 이 잠재적 ‘소’집단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지하듯이 EU,미국과의 FTA는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집단인 농어민 집단의 경제적 기반에 사형을 선고한다. 과거 한 칠레 FTA에서 포도농가 보호 조항과 같은 정도의 보호막도 없으며 WTO 체제 아래에서 농어업 보조금의 지불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은 농어민 집단의 몰락을 저지할 어떠한 제도적 방법도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다수의 중산층과 서민들로 구성된 서비스업 역시 EU와의 FTA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주변을 돌아보더라도 많은 주변인들, 특히 기업 퇴직자들의 다수는 영세자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EU와의 FTA로 붕괴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신분격하의 불안이 가득한 한국의 중산층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제조업 분야에서의 고용창출과 외국계 서비스 업종의 진출에 따른 고용창출을 통해 한국의 중산층 붕괴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잊지 말라 소위 귀족노동자로 불리는 현대차의 노동자들은 단위 시간당 임금이 높은 것이 아니다. 주 평균 100시간에 가까운 노동 속에서 추가근무수당, 주말수당을 받아서 총 임금이 높은 것이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단순 저노동 고임금이라면 울산 북구에 그토록 보약집과 건강원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한국의 제조업 특히 대기업들은 신규고용의 창출 못지않게 기존노동력의 극대화라는 과거 구조조정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 더욱이 중견기업들은 생산직에서 정식 사원의 신규채용 보다는 알바의 채용이 더 유리함을 알고 있다. 더욱이 많은 경우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파견용역근로로 불리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고용이 비용 대 효율이 좋다는 사실 역시 충분히 알고 있다. 또한 중산층 붕괴의 핵심이 3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가장 세대임을 생각할 때 이들이 재교육과 재경쟁을 통해 새롭게 창출되는 노동시장에 연착륙할 가능성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역시 고민해볼 문제이다.

  성장과 제조업 중심 경제 논리에 빠져있는 한국사회에서 제조업의 성장은 절대적인 교리이다. 한국 정부는 제조업과 금융의 성장만이 살 길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위해 바닥에 있는 이들이 디디고 사는 그 최후의 보루마저 앗아가려 한다. 삶을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를 잃은 이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미 10을 지닌 제조업이 12를 갖기 위해 1을 가진 농업에게 그 1마저 희생하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당연히 여긴다면 과연 그 사회 괜찮은 사회일까? 미국 그리고 EU와의 FTA로 얻을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잃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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