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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영대신문 1611-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이시훈(정치외교학 박사과정, 본색 소사이어티 대표)

 

  젠틀맨 스파이 액션물을 표방하는 영화 <킹스맨>이 화제다. 한국의 영화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흥행할 수 없으리라 여겨온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임에도 이미 500만 이상이 영화를 관람하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의 핵심적인 스토리는 인생에 별다른 희망을 가지지 못한 채 문제아로 살던 주인공 에그시가 세계적인 첩보 기구의 요원 선발과정에 참여하게 되고, 온갖 고난을 거쳐 결국 세계를 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 영화에 열광할까? 이유는 물론 다양할 것이다. 영화의 연출과 액션 곳곳에 숨어 있는 매우 새로운 시도들, 배우들의 멋진 옷차림과 연기, 액션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상징하듯 보통의 가난한 가정 출신 청년이 놀라운 재기와 판단, 헌신적 노력으로 악한 사회 지도층을 응징하고 세계를 구하는 영화의 서사가 주는 쾌감 역시 흥행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겠다.

  영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코드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의 가난한 청년 세대를 상징하는 차브(chav)’. 영화에서 묘사되듯 이들은 허름한 야구 점퍼나 패딩, 모조품 따위를 쓰고 절도, 폭력, 마약 등에 노출된 채 삶이 개선될 가능성을 내려놓고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극중 콜린 퍼스가 보여주는 말끔하게 손질한 머리, 고가의 정장과 잘 닦인 고급 구두를 쓴 기성세대 엘리트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대조되는 존재다.

  차브는 이미 알려졌듯, 1980년대 영국을 지배한 대처리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황금기, 여태 단 한 번도 인류가 누려본 적 없는 물질적 풍요와 높은 수준의 부의 분배가 있었던 시대를 겪었던 이전 세대와 달리 대처리즘의 유산인 차브들은 태어나서 여태까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이 지배하는 세계를 살아왔다. 그들 대부분은 가난함에도 복지와 공공서비스를 향유하지 못하고, 교육 수준 역시 자연히 낮으며 이에 따라 취업을 통해 삶을 바꿀 가능성 역시 희박하다. 차브를 탄생시킨 양극화의 심화는 그들을 포함한 서민층 청년들에게 낙관적 미래를 빼앗아 갔고, 그들은 영화가 보여주듯 그야 말로 인생을 소모하며 살아가고 있다.

  최근 다시 세대 담론이 부상하고 있다. 한국에서 2000년대 후반에 출간 된 우석훈, 박권일의 저서 <88만원 세대>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소설 <천유로 세대>는 세대 사이의 노동, 임금, 복지 등 경제적 요인에 의한 갈등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세대담론은 보수언론들이 이른바 달관세대론을 제시하며 다시 부각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같이 삶의 개선을 포기한 채, 오로지 현재의 안온함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달관을 한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이 달관세대론의 요지다. 하지만 과연 이런 달관을 반가워 할 수 있을까? 영국의 차브와 유사하게 편의점 도시락과 김밥 따위로 연명하는 사토리 세대역시 헤이세이 공황과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이들은 더 이상 좋은 교육, 좋은 기업으로의 취업, 좋은 집 마련과 같은 세속의 일반적 욕구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서브컬처를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다. 즉 이들의 달관과 포기는 구조로부터 강제된 좌절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사토리 세대와 차브, 그리고 달관 세대의 달관은 진정한 의미의 달관이 아니라 절망의 일상화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에게 기성사회와 기성체제는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여전히 개인의 선택과 노력을 통한 더 나은 삶의 가능성, 더 넘어서 세계를 구원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물론 에그시가 세계를 구하는 데 있어 그가 성장하는 과정들, 즉 선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이 서사는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세계를 구한 에그시가 아니라 세계를 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이들이 한 세대 전체에 걸쳐 존재한다는 점이다. 에그시가 세계를 구하고 자신의 과거 무리들이 있던 선술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무리들은 여전히 무의미한 건달의 모습이었다. 과연 그 건달들로 표상된 보통의 차브들이 노력과 선택의 부재로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일까? 그들에게 부재한 것이 단지 과연 준비와 열정인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삶,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좌절해가는 보통의 차브들, 사토리들에게 기존과 다른 문법으로 그 가능성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세계는 한 명의 에그시가 구원할지 모르지만,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바로 가능성을 지닌 수많은 보통의 차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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