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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사라진 '너'와 성장하는 '극혐'

영대신문 1610-사라진 와 성장하는 극혐

 


이시훈(정치외교학 박사과정, 본색 소사이어티 대표)

 

  필자가 대표로 있는 인문 독회 모임인 <본색 소사이어티>에서 지난 2014124일 재일동포 디아스포라 문필가로 유명한 서경식 동경경제대 교수를 대구로 모시는 자리를 만들었다. 서 선생님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은 우경화 되는 우리 시대와 마이너리티, 인권, 문화와 예술 등에 걸쳐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였고 이는 한일 양국의 위태로운 현실에 큰 힘이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서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다음날 아침 선생님과 함께 차를 마시며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한 전날 모임은 비교적 정제되고 정리된 이야길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면 다음날의 티타임은 서 선생님이 느끼는 일본과 일본 청년들에 대한 내밀한 고민과 통찰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서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재특회와 같은 일본 넷우익에 속하는 학생들이 있으며 그들에게 보이는 특이점이 있음을 이야기하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계를 가상세계와 같이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즉 자신은 TV나 모니터, 스마트폰 등 디스플레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자신이 바라보고 겪는 현상, 사람, 관계, 사물 등은 모두 그 디스플레이 장치 안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서 선생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들은 강의조차도 교수가 하는 강의 영상 내지 연극을 보는 관객처럼 참여하며, 다른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영상 속의 캐릭터거나 기껏해야 사이버 세계의 아바타 정도로 바라본다. 사람들이 액션 게임에서 상대 캐릭터에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간적 고뇌를 느끼지 않고, 총을 쏘는 데 대해 죄책감과 자각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디스플레이 안의 인간들을 게임이나 방송의 캐릭터들과 다르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관계하는 타자에 대해 느끼는 일반적 정서, 감정, 태도는 사라지고, 그들은 나와 같은 인간에서 단지 가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격하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가하는 물리적, 언어적, 사회적 폭력을 당하는 상대에 대해 인간적 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인간이 하는 행동에 전제되는 에 대한 의식, 감정 등이 행동을 제약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재특회가 신오쿠보나 아키하바라와 같은 재일교포 밀집 지역에서 조선인에 대한 살인, 추방, 폭력, 강간 등 폭력적인 구호와 선전을 연발해도, 그들 스스로는 어떤 윤리적 자각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서경식 선생님의 이런 고찰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타자 상실과 그로부터 강화되는 혐오 감정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기고 IS에 합류하러 떠난 김군은 한국 사회에 IS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웹 상에서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이런 페미니즘에 대한 웹 상의 공격은 한국 사회에서 혐오의 문제를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물론 이런 웹 상에서의 혐오의 존재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이전부터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혐오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들이 뉴스 댓글, 블로그 등 SNS를 통해 등장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혐오 감정을 이제 보통의 이들이 광범위한 이들을 대상으로 표출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넷우익들을 중심으로 한 호남 혐오, 대구 지하철 참사나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 대한 비하 등은 웹 상에서 너무 일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이런 혐오 감정이 김치년이란 단어를 통해 여성 전반에 대한 혐오로 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여성,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혐오, 언어적 폭력 등이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혐오 감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적대 감정 중에서도 그 정도가 강한 것이다. 하지만 보편화된 극혐과 같은 말들이 보여주듯 우리 사회 특히 청년과 학생들사이에도 혐오는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극혐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뜻과 그 강도가 일반적인 혐오와 달리 그 무게와 정도가 약하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혐오의 과잉, 혐오의 일상화를 단지 특정 세대가 가진 문화적, 정서적 맥락의 특수성만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면에서 극혐과 같은 혐오 표현의 일상화,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 표현의 확산을 설명하는 데 서경식 선생님의 고찰은 많은 설명의 단서들을 제공한다. 서경식 선생님이 바라본 일본의 20대들처럼 우리 시대의 청년들 역시 를 상상하고 그의 고통을 반추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같은 인간으로 느끼는 그런 감수성이 사라져 간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