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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메모] 종북 프레임의 성격을 분석하기 위한 아이디어들 1

종북 빠져 나올수 없는 그물


1. 그녀가 나에게 내 정체성을 물었다. “당신은 A인가요?” 여기서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다. “네 전 A입니다.” 아니면 “아니요, 전 A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니요 전 B입니다.” 상대가 나를 A라고 규정짓거나, A라고 물을 때 우린 그에 대해 대개 이 세 가지 대답을 할 수 있다. 물론 아주 유보적인 응답으로 “잘 모르겠다.”의 가능성이 있지만 이건 대답이라기 보단 유보에 가깝다.


2. 그런데 가끔 상대의 질문이나 규정이 나에게 Yes or No 만을 강제할 때가 있다. 질문의 문법으로 봐선 세 가지 선택이 존재 할 것 같지만, 실제 그것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세 번째 대답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예컨대 “당신은 이단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을 마주한 이는 자신이 이단인지 아닌지만을 답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되는걸까? 문제의 핵심은 질문의 문법에 있지 않다. 오히려 대답의 문법을 제약 하는 어떤 기제의 탓이다. 그렇다면 그 기제는 무엇일까?


3. 왜 그는 A인지 아닌지에 제약 받게 될까? 그것은 A와 B라는 두 선택사항의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A는 A 아닌 모든 것과 이분법적 상황에 놓여있다. A와 B는 병렬적인 관계가 아니며, B는 여기서 ‘A 아닌 모든 것’의 범주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에 답을 하는 이에게 ‘B’라고 밝히는 것은 얼핏 ‘A 아닌 것’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4. 이런 경우는 한 사회가 이른바 이분법적인 대립이 존재 할 때 작동하는 프레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넌 이단이냐? 넌 적이냐? 넌 종북이냐? 여기서 정통으로 간주된 것 내의 하부 유형들, 아군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입장들, 종북 아닌 것들 사이에 존재할 반북, 친남 등으 분류는 모두 공통으로 존재한다. 결국 이 이분법적 상황에서 <광장>의 명훈이 했던 “중립국”과 같은 선택은 문법적으로 엄청나게 어색하고 이상한 답이 된다.


5. 조지 레이코프를 위시해 여러 사람들이 적었듯 프레임 전략의 요체는 결국 상대의 사고, 선택, 행동의 반경을 제약한다는 데 있다. 결국 종북 프레임은 상황을 이분법적 세계로 몰아가고 세계는 종북과 종북 아닌 것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이 게임 내의 행위자들의 사고와 행동, 언어, 선택은 모두 이 두 요소에 의헤 제약된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질문의 가장 강력한 효과는 이미 이 질문 내지 세례를 받았다는 자체로 실제 답이 Yes 이건 No이건 사람들은 앞의 질문에 대해 구속력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즉 상대에 대해 피상적 이해만 가지고 있는 관객은 행위자가 상대에게 가한 “너 종북이지”라는 질문에 노출된 순간 그 질문 받은 이를 ‘종북 프레임’ 속에 갇혀서 사고하게 된다. 고로 프레임은 질문, 공격, 세례를 받은 대상만 아니라 이를 둘러싼 관객들에게도 매우 강하게 작동한다. 당장 최근의 신은미씨 사태를 보라, 난 주변의 통일운동 하시는 선배들 덕에 그에 대해 일반 대중들 보단 조금 나은 이해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난 그가 그저 북에 대한 적대적이지 않은 자세와 마음이 있고, 좀 나이브하고 순진하더라도 최대한 북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려 하고, 자신이 직접 본(비록 그것이 북한 정권에 의해 통제된 풍경일지라도) 북의 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이지 종북 같은게 아니다. 그런데 신은미, 북한 다녀옴 이라는 키워드에 종북이란 프레임이 조합되자 신은미라는 그냥 아줌마는 일약 국민적 종북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이런 효과는 얼핏 보면 의도치 않게 나타난 프레임 전략의 외부효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효과는 프레임에 힘을 부여하는 전체 사회의 정서, 태도, 이념, 경험, 맥락, 정체성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프레임이 야기하는 헤게모니의 산물이라 보는 게 옳다.


6. 문제는 이 종북 프레임이 과연 건강한 프레임이냐는 것이다. 종북 프레임의 국내외적 효과를 살펴보자


국내적 수준

1) 적과 아군의 구분

2) 아군의 결집

3) 적에 대한 배외주의와 고립, 탄압의 정당화

4) 국가주의


국제적 수준

1) 북에 대한 비정상 국가화와 배외주의 정당화

2) 아시아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


  우선 종북 프레임이 낳는 중요한 효과 중에 하나는 ‘우리 형성’이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 대개 사람들이 모여 ‘우리’를 형성하는 방법은 크게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순전히 ‘우리 자체’로부터 ‘우리’를 도출하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우린 20대들이다. 우린 남자들이다. 우린 친구들이다 등 ‘우리’에 내재된 속성들로부터 ‘우리 의식’을 도출하는 것이다. 다른 한 방법은 바로 외부, 타자를 상정하고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종북 프레임이 낳는 우리 형성은 타자, 즉 북한과 종북세력(여기서 이것의 실제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있다고 가정하는것 만으로도 충분하단 사실을 우린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을 전제한 우리 형성이다. 누구도 종북에 반대하는 이들의 정체성이 뭔지 모른다. 그것이 친남인지 종남인지 반복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단지 ‘종북 아님’으로 설명한다. 만약 그들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북한의 붕괴와 종북세력의 척결이 이뤄진 이후에는? 그들은 또 다른 적을 상정하고 그들의 정체성, 기득권, 권력구조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다음 적은 누구일까? 여튼 정리하자면 종북 프레임은 단순히 북한에 반대하는 프레임이 아니다. 적의 존재로부터 나온 어떤 정체성, 정서에 기생하여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전략이 종북 프레임에는 담겨 있다. 이 프레임 내에서는 어쩌면 북의 존속과 ‘종북세력’에 대한 의심이 더 오래 갈수록 기득권에겐 유리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편 이 적의 존재로 유지되는 이 ‘우리’는 그 내부 기득권 구조의 유지를 위해 계속적인 적을, 배외의 대상을 요구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