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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 잉여

초콜렛 도넛

초콜렛 도넛(Any day now), 2014

 


0.사실 아침에 이런저런 핑계로 미적거리다가 영화 앞부분 20분을 놓쳤다. 그래서 보는 내내 영화의 서사를 앞부분의 상실로 인해 못 따라 갈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봤다. 하지만 다행히도 앞선 20분의 파편을 여기저기서 발견했다. 영화는 적지 않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준수했다. 우선 영화는 관객들에게 한 아름의 고민거리를, 메시지를 안겨 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1.루디는 게이바에서 여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삶을 살아가는 동성애자다. 그런 중 그의 이웃에 살던 마약중독자 엄마가 체포되며 보호자를 잃어버린 아이 마르코와 연을 맺게 된다. 마르코, 딱 보기만 해도 예사롭지 않다. 그래 이 아이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금발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바비인형 에슐리를 사랑하는 아이는 엄마의 체포를 계기로 루디와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삶에 마찬가지로 게이인 검사 폴이 함께 하게 된다. 루디와 폴이 마르코의 양육권 문제로 이야길 시작해서 둘은 한눈에 빠지고, 세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영화의 주된 스토리는 루디와 폴이 마르코의 양육권을 찾아오는 과정이다. 결과는..?

 

2.영화가 드러내는 갈등의 지점이 있다. 우선 이성애(정상)-동성애(비정상)의 구도다. 폴이 검사직에서 해임되는 과정, 특수학교 교사가 주변 학부모들의 웅성거림을 전하는 부분에서 우린 그 사회의 지배적 양식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작동하는지 볼 수 있다. 최근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퀴어 페스티벌에서 일부 보수적 개신교 사제들이 저지른 폭력보다 훨씬 더 일상화되고 구조화된 폭력과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다. 결국 이 정상의 비정상에 대한 배제는 전도유망한 젊은 검사 폴의 커리어를 일순간에 파괴해버린다. 그는 그의 조직 내에서 이상한 자로 이단시되고 외면받고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지배적 가족 형태에 대한 문제다. 폴과 루디가 동성애 커플임이 드러나면서 잠정적 양육권이 박탈당하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진행한 첫 재판에서 판사는 루디와 폴이 마르코의 육아에 좋은 조건과 자세를 지녔음을 인정함에도 육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거는 바로 이들이 게이이고,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족 유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영구적인 육아권 인정을 받기 위해 열린 항소심에서도 검사는 이들의 육아 능력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검사는 오로지 루디의 비정상성만을 집요하게 드러내고 공격한다.

 

3.또 하나의 갈등 지점은 제도의 문제이다. 사실 왜 한국 개봉 제목을 초콜릿 도넛으로 했을까? 루디가 마르코의 양육을 맡기 위해 폴의 집에서 세 사람이 저녁 식사 하는 장면에 답이 있다. 폴은 밥을 먹지 않는 마르코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묻고, 마르코는 도넛을 이야기 한다. 마침 폴의 집에 도넛이 있었고, 이를 주는 폴에게 루디는 건강을 위해 끼니로 도넛을 줘선 안 된다고 한다. 이에 폴은 아이가 원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답한다. 사회와 제도는 마르코에게 두 사람이라는 초콜릿 도넛을 해롭다고 한다. 아이의 주체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제도는 이미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정상적인 가족 형태에 마르코를 끼워 맞추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제도가 요구한 조건의 어머니 밑에 돌아간 마르코는 어찌 되었는가? 그 어머니는 어느 남자와 마약을 하고 정사를 나누며 마르코에게 부를 때 까지 복도에 나가길 요구했다. 그리고 그게 마르코에겐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한 대화였을 것이다. 마르코는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과정 내내 여기가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마르코가 원하는 초콜릿 도넛은 비록 그 사회의 지배적인 형식, 제도와 부합하지 않더라도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사회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마든 제도로 한 아이에게 초콜릿 도넛을 앗아갔고, 결국 그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4.아쉬움도 크다. 대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잠재된 울림에 비해 밀도가 떨어진다. 특히 마지막 뒷심이 약하다. 재판으로 드러나는 인정 투쟁의 과정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재판 과정도 지나치게 생략적이고 단순하다. 실화가줄 수 있는 어떤 법정 공방의 치열함이 있을 법 한데 영화에선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초콜릿 도넛이 지닌 영화적 미덕이 약하지는 않다.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슬프지만 덤덤하다. 간혹 나오는 6mm 핸드헬드 촬영분에서 묻어나오는 강한 부모애가 느껴지지만 영화 전체는 상당히 덤덤하다. 그리고 영화 전체의 개연성과 전달력이 약한 것 역시 문제점이다. 폴은 마르코의 죽음 앞에 여러 당사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그 편지가 주는 메시지는 영화 전체의 울림을 승격시키는데 까지 이르지 못했다. 또한 마르코의 죽음이 주는 비극성, 외부가 요구하는 행복의 조건과 전제와 실제의 행복이 지니는 간극, 인정 투쟁의 과정이 기대만큼의 감정의 밀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이런 문제는 짧은 영화의 러닝타임 내에서 세 사람이 사랑을 형성하는 과정을 지나치게 축약적으로 보여준 것에서 기인한다. 세 사람 사이의 신뢰와 애정이 형성되는 과정이 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폴과 루디가 마르코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은 개연성이 약하고, 그들이 투쟁하는 이유는 이전의 사랑함이 쌓여가는 과정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는다. 우린 이미 그들이 사랑한다는 것을 잠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영화는 그 잠정적 이해에 극적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해주지 않고 있다. 결국 비극은 드러나지만 비극을 현실적으로 만드는 사랑함의 과정이 딱 드러나서 와 닿지 않는 것이다.

 

5.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다양한 행복의 양식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사랑과 필요는 그들이 원하는 해피엔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정의는 사회적 편견과 배제의 원리 속에 묻혀버렸다. 영화는 1970년대 후반, 이제 갓 동성애 이슈가 전면화 되기 시작한 미국 사회에서 게이 커플이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벌이는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당시에 비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양식이 얼마나 지배적 양식으로부터 배제 당하고 금기시 당하는지 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이상한 사람, 변태, 정신병자 따위로 매도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사회는 국가와 제도로써 개인의 삶과 생명, 재산을 지켜주지만 정작 보호 받아야할 이들의 초콜릿 도넛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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