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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뇌피질의 낭비

한국의 진보 개념 문제(작성중, 저장)

한국의 진보 개념 문제

최소강령‧최대다수 연합의 형성과 대안적 ‘우리’ 구축전략


 

  정치의 본질은 너와 나의 구분과, 너와 나의 관계를 매개로 한 분배장치에 있다. 정치는 ‘너’와 ‘나’가 만난 순간 본질적으로 등장한다. 지극히 이상적으로 ‘너’와 ‘나’가 동등하고 서로주체적 관계를 형성한다면 좋겠지만, 이 세상 모든 욕구충족의 기회구조는 ‘너’와 ‘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 ‘너’와 ‘나’사이에 정치가 나타난다. 아마 초기의 모든 정치는 ‘배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욕구충족의 기제에 접근할 수 있는 ‘나’ 혹은 ‘너’는 상호 일l방이 그것에 접근할 수 없도록 상대를 배제코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일방이 그 집단의 욕구충족 기제를 독점했을 때 일어나는 위협과 불안, 그리고 욕구의 충족이 주는 효용이 점점 체감한다는 원리의 각성은 나의 초과, 나의 잉여를 통해 배제된 자를 어르고 포섭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결국 정치는 기회의 접근권을 둘러싼 관계들이다. 이것들은 때로 경쟁적으로, 때로 타협적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 보여주듯 우린 이 관계들 속에서 더 유리한 타협, 더 유리한 경쟁을 위한 관계지평을 확장시켜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동맹, 연합, 협력, 공존 등 다양한 형태의 만남들로 설명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 오랜 시간 권위주의 정치세력의 통치 하에 놓여있었다. 냉전이라는 세계체제적 조건은 권위주의적인 지배세력에게 한국 정치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매우 우편향적이고 협애하게 만들었다. 지배세력이 추구하는 이외의 가치, 이념, 이론 체계들은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탄압받았다. 그렇게 제 1공화국 시기 조봉암과 진보당이 사라졌고,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이후 조용수와 민족일보를 그렇게 제거했다. 권위주의-냉전-분단의 결합은 심지어 온건한 자유주의자들마저 탄압받게 하였다. 탄압기제는 때로는 순수한 이념적 지향으로 작동했고, 때로는 지베세력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동원되며 수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갈랐다.

  그런데 한국의 반체제 세력, 저항세력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레토릭이 있다. 바로 진보이다. 서유럽에서 진보, Progressive의 의미가 극우 포퓰리즘, 네오나치, 극단적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대한 지향을 가진 정치세력들이 사용하는 반면, 한국에선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진보로 규정, 사용한다.

  왜 한국의 저항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진보, Progressive로 찾은 것일까?

 

 이 글은 한국의 저항세력이 사용한 진보 개념을 통한 저항세력이 추구한 일련의 '우리' 형성, '우리' 구축 전략을 확인하고자 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정치는 결국 만남과 관계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고, 작동하는 장 역시 만남과 관계의 장이다. 이는 지배세력만 아니라 저항세력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항세력은 끊임없이 그들의 만남의 지평을 확장시키고자 한다. 저항세력이 지향하는 목적의 달성은 결국 그들의 만남과 관계가 작동하는 범위가 지배세력의 그것보다 넓을때에 가능해진다. 이에 지배세력도, 저항세력도 끊임없이 그들의 친구, 그들의 동료, 그들의 협력자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의 저항세력이 이런 만남 지평의 확장을 위해 추구한 첫 시도는 바로 총체성에 대한 저항이다. 한국의 저항세력은 집권세력에 대해 민족-반민족, 민주-반민주, 자유-국가, 애국-친미와 같이 지배세력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 대척점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총체성에 대한 저항은 현 체제에 대한 변화, 저항을 추구하는 더 넓고, 더 다양한 세력이 손을 잡을수 있는 꼬챙이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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